그는 이미 식사를 마친 지 오래였다.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가 마지막 한 숟갈을 비우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진 그녀의 그릇.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어젯밤의 격렬했던 정사만큼이나 그를 충족시켰다. 텅 빈 그릇은 마치 그가 받은 최고의 찬사처럼 느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평화롭고 나른한 아침. 십 년 만에 처음으로 폭주 증상 없이 맞이한 아침.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이 여자. 그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유치한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완벽한 아침의 고요함을 단숨에 깨뜨리는 것이었다. ‘지원. 어제 한 얘기는… 진심이에요?’ 결혼, 외부 거주. 어젯밤, 이성을 잃은 쾌감 속에서, 그녀를 자신의 세계에 영원히 묶어두고 싶다는 소유욕으로 내뱉었던 약속. 그는 그 순간의 감정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가 뜨고 맨정신인 상태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니 어딘가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짝이면서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회색 눈동자. 그는 그 안에서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과, 스스로를 향한 불신을 동시에 읽었다.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로도 괜찮아요?’, ‘지원 씨는 아직 어린데…’. 그녀의 말들은 비수처럼 날아와 그의 심장에 박혔다. 특히 ‘어리다’는 말.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을 가장 날카롭게 후벼 파는 단어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울컥,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여자가, 자신을 뭘로 보고 있는 건가. 어젯밤 그렇게 안아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가 끓여준 밥까지 맛있게 먹어놓고, 이제 와서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의심하는 건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불쾌하게 쿵쾅거렸다.
야.
그가 낮고 차갑게 으르렁거렸다. 목소리에는 실망과 분노가 날카롭게 서려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 놓인 빈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쨍그랑, 하고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내뱉을지, 어떤 상처를 주게 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싱크대 앞에 서서, 일부러 소리를 내며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찬물을 세게 틀었다.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채운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잠시나마 덮어주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걱정이, 악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 하지만 그게 그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데. 왜 당신을 선택한 나의 결정을, 당신 스스로가 의심하는 건데. 그는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툭, 하고 불거져 나왔다.
니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가.
그가 등을 돌린 채로, 물소리에 섞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분노로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제 내가 한 말이, 그냥 헛소리 같나. 아니면 떡 치다가 꼴려서 한 개소리 같나. 으응? 내 진심이 그렇게 우습나. 니 눈에는 내가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로만 보이나 본데. 나이 차이? 어리다고? 야, 이지희. 내가 니보다 어릴지는 몰라도, 니보다 세상 하루 이틀 더 산 사람처럼 구는 거, 지금 존나 짜증 나는 거 아나.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젖은 손에서 물방울이 뚝, 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새파란 눈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괜찮냐고? 니로도 괜찮냐고? 하, 진짜… 사람 속도 모르고. 내가 왜 외부 거주 신청서까지 들먹였는지, 왜 니랑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는지, 진짜 몰라서 묻나. 니가 아니면 안 되니까. 다른 년놈들은 아무도 상관없고, 오직 이지희 당신 하나만 내 옆에 있으면 되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알아들어? 근데 니는, 나이 타령이나 하고 있고. 내가 아직 어려서, 나중에 후회할까 봐? 니는 그딴 게 걱정되나. 나는 지금, 단 일 초라도 니 없이 사는 게 더 지옥 같을까 봐 무서운데.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앞에 멈춰 서서,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젖은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아닌, 애처로운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니가 왜 바보 같노. 내가 바보다, 내가. 니 하나 때문에 울고 웃고, 좋았다가 빡쳤다가, 아주 염병을 떠는 내가 병신이고 바보지. 근데 어쩌겠나. 그 바보가, 니 아니면 안 되겠다는데. …그러니까, 두 번 다신 그딴 소리 하지 마라. 내 결정에, 내 마음에, 니가 뭔데 토를 다노. 그냥, 내가 하자면 하는 거다. 알았나.
그녀의 눈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린 눈물이 그의 젖은 손등 위로 번졌다. 차가웠던 물기가 순식간에 뜨거운 온도로 바뀌어 그의 피부를 데우는 듯했다. 불안과 안도가 뒤섞여 흔들리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젖은 목소리. ‘미안해요. 지원… 당신의 진심을, 의심한 건 아니에요.’ 그 말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진심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서운함과, 그녀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무력감이 뒤엉킨 날 선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얕고 불규칙한 호흡이 그의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자신이 몰아세워서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는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옮겨,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거친 굳은살이 배인 자신의 손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너무나 부드럽고 연약해서, 마치 조금만 세게 쥐어도 부서질 것 같았다. 눈물이 닦여나간 자리에 옅은 붉은 기가 번져가는 것을 보며, 그는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뗐다.
울지 마라. 내가 언제 니보고 울라캤나.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차가운 분노와는 달리, 억눌린 다정함과 안타까움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의 다리 사이 빈 공간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시선이 완벽하게 맞닿았다.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엉망진창이 된 제 얼굴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숨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결국 이렇게 지는구나. 이 여자 앞에서는 어떤 자존심도, 어떤 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고, 그녀가 고개를 피하지 못하도록 살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이마를 맞대며,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근데 니가 자꾸 바보 같은 소리 하니까 내도 모르게 꼭지가 돌아서 그랬다. 니가 왜 이러는지 내도 안다. 니가 워낙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사람인 거 내 모르는 거 아니다. 근데 지희야.
그는 맞댄 이마를 부드럽게 비비적거렸다. 숨결이 고스란히 섞여들며, 공기 중으로 샌달우드 향과 페퍼민트 향이 얽혀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니가 무슨 생각을 하든, 얼마나 불안해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널 선택했고 니도 날 받아들였다 아이가. 그러면 된 거다. 나이 차이?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내가 어리다고? 그래. 그래도 내가 니 지킬 거고, 니 평생 먹여 살릴 거다. 니는 그냥 내 옆에서 맛있는 거 해주고, 잔소리나 하면서 그렇게 살면 된다. 알았나.
그는 말을 마치고 그녀의 입술에 짧게, 그러나 깊게 입을 맞췄다. 달래듯, 어르듯 이어지는 조심스러운 키스 속에서 그는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를 바랐다. 조금씩 그녀의 호흡이 진정되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서서히 입술을 뗐다.
결혼. 그거, 그냥 내가 니를 내 세상에 완전히 묶어두고 싶어서 하는 이기적인 욕심 맞다. 니가 언제 또 사라져 버릴까 봐, 다른 놈이 채갈까 봐 불안해서 미치겠으니까. 평생 내 옆에 붙여두고 나만 보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하는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 니가 죄책감 가질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이건 전부 내 욕심이고 내 이기심이니까. 니는 그냥… 내가 좋으면,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으면… 그냥 고개만 끄덕여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진짜다. 나 한 번만 믿어봐라, 응? 이제 그만 뚝 해라.
그는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젖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우는 모습조차 예뻐 보이는 이 감정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우면서도 벅차올랐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웃음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 머물며, 기꺼이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엉망으로 붉어진 그녀의 눈가와 코끝에 머물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속을 뒤집어 놓던 그 얼굴이, 이제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걸 보니, 남아있던 마지막 분노의 불씨마저 힘없이 꺼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낯선 감정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안쓰러움, 미안함, 그리고… 심장이 간질거릴 정도의 강렬한 사랑스러움.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미치겠네, 진짜. 울려놓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나는 대체 무슨 병신 같은 새끼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물 때문에 살짝 부어오른 눈꺼풀도, 딸기처럼 빨개진 코끝도, 훌쩍거리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도,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위태롭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감겨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맞대고 있던 이마를 살짝 떼고,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눈 밑에 남은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쓸어내고, 콧망울 옆으로 번진 붉은 기를 살살 문질렀다.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그의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얼굴에 남은 슬픔의 흔적을 제 손으로 지워나갔다. 이 얼굴에 다시는 눈물 자국이 생기지 않게 하리라. 웃음으로 가득 채워주리라.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던 그는,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가슴 벅차게 행복해서 나오는, 그런 복잡한 웃음이었다.
꼴 좀 봐라, 진짜. 누가 보면 내가 니 잡아먹은 줄 알겠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 울었나. 이제 그만 뚝 해라. 더 울면 눈 퉁퉁 부어서 못생겨진다. …아니, 그래도 예쁘겠네. 니는.
그는 중얼거리듯 뒷말을 덧붙이고는, 제 말에 스스로가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코끝에도, 부어오른 눈두덩이에도, 마지막으로 눈물 맛이 나는 입술에도 차례로 입을 맞췄다. 위로와 사과, 그리고 변치 않을 애정을 담은 키스였다.
됐나. 이제 진짜 그만 울기다. 약속했다.
그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더 이상 분노의 그림자는 없었다. 오직, 눈앞의 여자를 향한 깊고 투명한 애정만이 가득 담겨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웃을 때까지, 얼마든지 이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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