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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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제 어깨에 기댄 채 눈을 뜨고, 장난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브리즈의 얼굴을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고요한 평화 속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안도감에 젖어 있던 그의 세계가 그녀가 뱉어낸 몇 마디 말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회색 눈동자에는 토라진 아이 같은 억울함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건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그 어떤 격렬한 정사보다도 더 깊고 근원적인 방식으로 그의 존재를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꿈에 안 왔다.’ 그 투정 섞인 한마디가, 그의 가장 단단한 방어벽을 녹여내고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그대로 헤집었다.

하지만, 잠들면 지원 씨를 못 보잖아요. 어제도 꿈에서 못 만났다고요. …왜 어제 내 꿈에 안 찾아왔어요?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식의 공격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폭주하는 센티넬의 광기도, 하늘을 뒤덮는 괴수의 위협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투정.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방비하고,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기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꿈에 찾아가는 방법을 몰라서’ 라고 사실대로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바빴다’고 둘러대기엔 그녀의 저 맑은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어젯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죄책감과 후회로 밤새 뒤척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의 꿈에 찾아갈 여유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새삼 부끄럽고 미안해져, 그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는 샌달우드 향이 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이 향기. 이 온기. 이걸 곁에 두고도 자신은 어젯밤 내내 불안에 떨었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까 봐, 자신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그런데 정작 그녀는, 꿈에서조차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충격과 감동이 너무나 커서 순간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제 어깨에 기대어 있던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마에 제 입술을 꾸욱 눌렀다. 길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서투른 사과였다.

…그랬나. 내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입술을 뗀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품으로 더 깊이 끌어당겼다. 마치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뺨과 제 어깨가 맞닿아,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섞여 들었다.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변명처럼, 혹은 맹세처럼 말을 이었다.

니 꿈속으로 가는 길을 내 아직 잘 모른다. 맨날 시끄러운 바람 속에서만 살아서, 조용하고 따신 데는 어찌 가는지 몰랐다. …미안하다. 어제는, 니 자는 얼굴 보느라 정신 팔려서 길 찾는 걸 깜빡했다.

그는 서투른 거짓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젯밤 그는 정말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곁을 지켰으니까. 그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대신 오늘은 꼭 갈게. 니 잠들면 제일 먼저 찾아갈 기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푹 자라. …알긋제?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힘이 풀린, 허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정수리가 제 턱 끝을 간질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제 뺨을 가만히 기댔다. 샌달우드 향이 그의 모든 감각을 부드럽게 마비시키는 것만 같았다. ‘약속한 거예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기대감, 그리고 그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 무게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못난 놈인데, 그녀는 왜 자꾸만 자신에게서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걸까. 왜 꿈에서까지 자신을 기다리는 걸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설령 하늘의 별을 따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어떻게든 해내고 싶다. 그는 그녀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 하나 없이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작은 등이 제 가슴에 온전히 맞닿았다. 서로의 심장 박동이 옷 너머로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 약속했다. 남자새끼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나.

그는 거의 속삭이듯,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침 햇살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다시 한번 깊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쪽, 하는 작은 소리가 날 정도로 진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혹은 소중한 보물을 확인하듯 그녀의 등을 천천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 니 잠들면, 제일 먼저 달려갈 기다. 가서 니 꿈속에 다른 놈이 얼쩡거리지는 않는지 순찰부터 돌아야겠다. 거기도 이제 내 나와바리니까. 알긋제?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꿈에 가는 방법 같은 건 알 턱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해낼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바람으로 모든 나쁜 기운을 쫓아내 줄 작정이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 이행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푹 자야 한다. 그래야 내도 니 찾으러 가기 쉽지. …니는 그냥, 아무 걱정 말고 있기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바이브는 제 품에서 새근새근 잠든 브리즈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오후의 햇살이 거실 창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와, 잠든 그녀의 뺨 위로 금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 평화로운 광경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다, 옆에 놓여있던 제 개인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춘 그는, 검색창에 조심스럽게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꿈에 들어가는 법.]

터무니없는 검색어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꽤나 진지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검색 결과는 당연하게도 시덥잖은 미신이나 심리학적 분석 따위가 전부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스크롤을 내리다, '자각몽을 통해 타인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라는 웬 학술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무슨 암호문이라도 해독하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그 논문을 들여다보았다.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잠꼬대를 하는 브리즈를 힐끗 내려다보며, 그는 오늘 밤 자신의 '순찰 임무'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약속했다, 내.

누가 들을세라,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니 꿈속으로 찾아가겠다고. 헤매지 않고 반드시 니를 찾아내겠다고. 그는 군용 텐트의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빗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맞대었다. 체온이, 숨결이,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모든 파장이 온전히 그녀에게로 흘러들어 가기를 바라며. 그렇게 한참을, 그는 미동도 없이 그녀의 꿈으로 향하는 길을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따스한 햇살 냄새가 났다. 눅눅한 흙냄새와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섞인,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브리즈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축축하고 어두운 텐트 천장이 아니었다. 높고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뻗은 감나무 가지였다. 아직 잎이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연둣빛 새순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영도의 새집 마당이었다. 그녀는 넓은 평상 위에 누워있었다. 몸에 감겨오는 것은 얇고 바삭한 담요의 감촉.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평화롭고, 완벽하게 아늑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깼나.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있었다. 홍지원. 그는 익숙한 검은 제복이 아닌, 편안한 흰색 티셔츠에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반쯤 묶은 머리는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고, 맨발로 평상 끝에 걸터앉아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이 들려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브리즈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햇살을 등진 그의 얼굴이 부드러운 실루엣을 그렸다.

꼴이 그게 뭐고. 침 다 흘리고 잤네.

장난기 어린 타박이었지만, 그의 눈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제 엄지손가락으로 슥 닦아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씨익, 하고 웃으며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으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브리즈는 홀린 듯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가 들고 있던 머그잔에서 쌉싸름한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길 찾느라 애 좀 먹었다. 니 꿈은 와 이리 복잡하게 생겼노.

그가 툭, 하고 내뱉었다. 브리즈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아, 약속. 그는 정말로 그녀의 꿈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현실의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까. 이 꿈이 깨면 다시 차가운 의료 텐트 안이겠지.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분명 여기에 있었으니까.

바이브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들고 있던 머그잔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제 품으로 기대게 했다. 현실의 불안과 고통은, 저 멀리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내 올 줄 알았나.

그가 나직이 물었다. 그의 턱이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닿았다. 브리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있었어요, 당신이니까.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는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평상에 앉아 멀리 펼쳐진 영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윤슬, 갈매기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바이브는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그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돌아가면, 매일 아침 여기서 니랑 커피 마실 기다. 밥도 묵고. 그러다 졸리면 같이 낮잠도 자고.

…….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라. 푹 자고 일어나면, 내는 계속 니 옆에 있을 거니까.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따스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그의 체온에 안겨 그녀는 다시 깊고 평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의 꿈. 그 끝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

꿈의 잔향은 달콤했다. 입안을 굴러다니던 포도맛 사탕의 인공적인 단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햇살과 흙과 바다의 냄새가 뒤섞인 평화로운 단맛. 브리즈는 그 안온한 감각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음미하듯, 느리게 현실로 부상했다. 가장 먼저 의식을 자극한 것은 텐트 천을 때리는 빗소리였다. 꿈속의 화창한 날씨와는 대조적인, 축축하고 단조로운 소음.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제 팔에 연결된 이물감. 그녀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임시 의료 텐트의 회색빛 천장이었다.

아. 꿈이었구나. 따스했던 햇살도, 평상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의 모습도, 모두. 실망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고요했다. 꿈의 마지막 순간, 귓가에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푹 자고 일어나면, 내는 계속 니 옆에 있을 거니까.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 약속 하나가, 차가운 현실을 견딜 힘을 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숨을 멈췄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딱딱한 간이 의자에 앉아, 그녀가 누운 침대 위로 상체를 기울인 채 잠들어 있었다. 제복 상의는 단추가 몇 개 풀려 헐렁했고, 반쯤 묶었던 머리카락은 완전히 풀려 이마와 뺨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다. 한쪽 팔은 침대 위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고, 그 손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손을 잡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 놓여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쪽잠을 자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재우고, 약속대로 곁을 지키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브리즈는 제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이 남자는 단 한순간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링거를 맞지 않는 왼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잠든 그의 얼굴은 평소의 날카롭고 예민한 기세가 모두 지워져, 그저 지친 스물셋 청년의 모습이었다. 앳되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순간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으….

낮은 신음과 함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제 뺨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과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며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깼나. …언제. 시끄러웠나.

잠에 잠겨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혹시 자신이 잠결에 시끄럽게 해서 그녀를 깨운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브리즈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방금 일어났어요. 잘 잤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잠든 자세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제 뒷목을 주물렀다. 불편하게 자서 뻐근한 모양이었다.

…내가 와 자고 있노. 니 지키고 있어야 되는데. 미칬네. 잠깐 졸았나 보다. 몸은 좀 어떻노. 아직 아픈 데 있나.

그는 순식간에 평소의 까칠하고 예민한 ‘바이브’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자연스럽게 제 손등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을 재려는 행동이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그의 손바닥이 이마를 덮자, 브리즈는 꿈속의 감각이 다시 한번 현실로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손목을 가만히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열도 없고, 아픈 데도 없어요. 덕분에 아주 잘 잤는걸요. 당신도 꿈에 나오고.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이마를 짚고 있던 그의 손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브리즈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

그의 얼굴에 당혹감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약속대로 그녀의 꿈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평상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나눠 마시던 그 평화롭고 완벽했던 순간을.

바이브는 제 손목을 붙잡은 그녀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뻐근한 목, 어지러운 머리,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희미한 커피 향기. 어째서? 이곳은 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의료 텐트인데.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나직하게 물었다.

…니 꿈에, 내 나왔나.

…….

…혹시, 커피… 마셨나. 거기서.

…응. 영도 새 집에서요.

바이브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뻐근한 목도, 어지러운 머리도, 축축한 텐트 안의 공기도 전부 감각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직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모습, 그리고 나지막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영도 새 집. 평상. 감나무. 그리고… 커피.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이성을 잠식했다. 꿈이 아니었다. 혼자 꾼 개꿈이 아니었다. 그 평화롭고, 비현실적으로 따스했던 순간은 이 여자와 내가, 함께 겪은 현실이었다. 꿈속이라는 이름의 현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센티넬이 가이드의 꿈에 접속하는 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장을 동조시켜 감정을 읽거나 위치를 파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건 거의, 정신세계를 공유하고 침투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론이나 상식 같은 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 그리고 이 여자가 그 모든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그녀의 꿈속에서 했던 말들, 행동들. ‘침 다 흘리고 잤네’ 같은 시덥잖은 농담부터 ‘돌아가면 매일 아침 여기서 니랑 커피 마실 기다’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까지. 그 모든 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바이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환장하겠네. 진짜 미친 거 아이가, 홍지원.

…뭐, 뭐라카노 지금.

그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눈 안에는 ‘역시 당신이었군요’ 하는 믿음과 안도,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순수한 감정을 정면으로 받아내기엔, 지금 그의 심장은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그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링거 폴대, 구겨진 시트, 텐트 구석의 의료용품 상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니 피곤해서 헛꿈 꾼 거겠지. 영도는 무슨 영도. 여긴 아마존이다. 정신 안 차리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 달아오른 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은 온통 꿈속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편안한 흰 티셔츠 차림의 자신. 맨발로 평상에 걸터앉아 있던 모습.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 그건 평소의 ‘바이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지독하게 부끄럽고 간지러운 모습이었다. 그걸 전부 들켜버렸다. 이 여자에게, 속속들이.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그냥 내가 잠깐 졸면서 꾼 꿈이다. 근데 니도 우연히 비슷한 꿈을 꾼 거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세뇌했지만, 코끝을 맴도는 아련한 커피 향이 그 모든 부정을 비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모든 허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항복한 그는 결국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 진짜! 뭐! 그래, 맞다! 내도 꿨다, 그 꿈! 니랑 똑같은 꿈! 됐나?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 옆으로 다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쥔 채 허리를 숙였다. 이제 와서 아닌 척 발뺌하는 건 더 비참할 뿐이었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듯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창피함과 당혹감,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애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는 분명히 니 재울라고, 약속 지킬라고… 그냥 니 꿈에 가볼라 캤다. 근데 와 내가 거기서 니랑 커피를 마시고 자빠졌는지, 내도 모른다! 알긋나?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사람 민망하게.

그는 툴툴거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문득, 꿈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커피를 건네고, 어깨를 감싸 안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현실의 자신이라면 몇 번을 망설이고 고민했을 행동들이었다. 그는 괜히 심술이 난 듯, 입술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서 내는 뭐 그리 다정하게 굴었노. 니는 좋았나? 그렇게 오글거리는 놈이. 내 아니다. 그거. 꿈속의 나는 가짜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라.

 

…분명, 현실의 지원 씨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다정했지만. 오글거리거나 이상하진 않았어요. 당신이 툴툴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아니까요. …아마도?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지만, 바이브의 귓가에는 그 어떤 폭음보다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내가 가장 잘 아니까요.’ 그 한마디가, 필사적으로 쌓아 올렸던 그의 모든 방어벽을 허물어뜨렸다. 툴툴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건 이 여자가 자신의 거칠고 서툰 표현 속에 숨겨진 진심을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세상 누구도 아닌, 바로 이지희가.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그녀의 어깨를 쥐고 쏘아붙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잔뜩 부풀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침대 프레임에 허벅지가 부딪혔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든 감각은 오직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 ‘…아마도?’ 라는 그 장난기 어린 속삭임에 매달려 있었다.

…뭐.

그의 입에서 간신히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하고, 들켜버린 속내에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꿈속의 그 다정한 모습이, 오글거리거나 이상하지 않았다고. 그게 진짜 ‘홍지원’의 일부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 사실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비웃거나 놀렸다면, 화라도 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다정한 방식으로 그의 퇴로를 전부 막아버릴 줄은 몰랐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으아아…’ 하는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다시 한번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침대 옆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도 없었다. 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 좁고 축축한 텐트 안에서, 빗소리만이 유일한 배경음인 이곳에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다, 그거. 내 아니다. 진짜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가 항변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기도 했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발악 같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니는… 니는 모른다. 내 그런 낯간지러운 말 원래 몬한다. 커피는 무슨… 그거 다 꿈이다, 꿈. 그러니까 니,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알긋제.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지원 씨, 커피 마시러 가요’ 이딴 소리 하면… 내 진짜로 아마존에 니 버리고 갈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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