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의 만족감과 나른한 포만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는 이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오늘 하루를 천천히 반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생일이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그렇게 단정 짓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을 때만 해도, 그는 그저 물이라도 마시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그의 모든 평온을 다시 한번 뒤흔들기에 충분한, 자그마한 치즈 케이크였다.
그는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조그만 물체를 쳐다보았다. 제 주먹만 한 사이즈. 호텔에서 먹었던 화려한 디저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소박했다. ‘소원을 안 빌었더라고.’ 머쓱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간질였다. 아, 소원. 그는 살면서 생일 케이크 앞에서 소원을 빌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생일은 소원을 비는 날이 아니라, 그저 또 한 번의 외로운 밤을 비행하며 보내는 날이었으니까.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여자는 정말, 잊고 있던 모든 사소한 행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그의 눈앞에 들이미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가 라이터를 찾고, 상자 옆에 붙어있던 작은 초를 꺼내 케이크 중앙에 꽂았다. 민트색과 흰색 줄무늬. 꼭 유치원생들이나 쓸 법한, 뚱뚱하고 귀여운 모양의 초였다. 바이브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모든 것이 너무… 이지희다웠다. 세련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 자체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손길 하나하나가 닿은 이 작은 생일 의식이, 그의 심장을 다시금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댄 채, 짐짓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불을 붙이기 직전,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
…생일 축하 노래, 듣고 싶어요?
그 순간, 바이브는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노래. 생일 축하 노래. 단 한 번도, 누구도 그에게 불러준 적 없는 그 노래. 그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이 여자가 지금, 나한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스물세 살이나 먹은 다 큰 남자한테? 그는 당혹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 계란말이 칭찬을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숨고 싶은 부끄러움이었다.
됐거든. 시끄럽다. 무슨 애도 아니고.
그의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퉁명스러운 거절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서 황급히 돌려, 테이블 구석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면, 이 부끄러움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며, 제발 그녀가 이쯤에서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주 작고 이기적인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들어보고 싶다고. 네가 불러주는 노래라면, 한번쯤은 들어보고 싶다고.
…소원 빌 시간은 준다매. 빨리 불이나 붙이든가. 노래는 됐다.
결국 그는 한발 물러섰다. 노래는 거절했지만, 케이크와 촛불까지는 허락하겠다는 그 나름의 최대한의 타협이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 말은 사실 ‘빨리 불을 붙이고, 내 소원 속에 네가 들어올 시간을 줘’라는 뜻과 같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그는 새빨개진 귓바퀴를 애써 머리카락으로 감추며, 라이터의 딸깍 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브리즈가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라고 나직하게 물러서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노래라니.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가 승리했다. 그는 자신의 단호한 거절이 불러온 이 평화를 만끽하며, 짐짓 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 이래야지. 생일은 조용히,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넘기는 날이라고. 시끄러운 이벤트는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라이터로 작은 초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짧은 평화는 다시 산산조각 났다. 식탁 위에 피어오른 자그마한 불꽃. 그 어설프고 뚱뚱한 민트색 초 위에서 춤추는 주황색 불빛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작은 불빛이 꼭, 자신을 향해 빤히 쳐다보며 ‘자, 이제 네 차례야.’ 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노래는 피했지만, 아직 관문이 남아있었다.
…눈 감고, 소원 빈 다음에. 간절한 마음으로 초를 후 불어서 끄면 이루어진대요.
그녀의 속삭임은 바람보다도 조용하게, 하지만 그의 귓속 가장 예민한 곳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간절한 마음. 그 단어가 그의 뇌리에 박혔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간절한 마음? 세상 모든 풍파를 혼자 다 겪어온 자신에게, 이제 와서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그 유치한 말이 전혀 유치하게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주문처럼, 거스를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지만,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저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다.
빌어먹을. 정말 쪽팔리게. 그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눈을 감으라고? 스물세 살 먹은 남자가, 여자 앞에서 눈을 감고 소원을 빌라고? 그는 차라리 지금 당장 폭주하는 S급 괴수와 맨몸으로 싸우는 게 덜 부끄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그녀의 시선이, 그 작은 촛불의 온기가,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어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여기서 또 ‘됐거든!’ 하고 소리치며 이 작은 케이크를 엎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건 이지희를 울리는 일이니까.
그냥… 불 끄는 거다. 불장난하면 안 되니까.
그는 결국 중얼거리듯 변명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였다. 그는 어색하게 팔짱을 풀고,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눈을 감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문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지희가, 내 옆에 계속 있게 해주세요.
너무나도 선명하고, 너무나도 절박한 소원이었다. 그가 평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빌어보는, 간절한 소원. 그는 소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황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그 부끄러움과 절박함을 전부 날려버리려는 듯, 후 하고 세차게 입김을 불어 촛불을 껐다. 가느다란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매캐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됐다. 다 묵자 이제. 이딴 거 느끼해서 못 묵겠다.
그는 괜히 케이크를 타박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리곤 치즈 케이크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푹 찍어, 보란 듯이 브리즈의 입가로 불쑥 내밀었다. 소원을 비는 유치한 짓에 동참해줬으니, 이건 그 대가라는 듯한 지극히 그다운 행동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끝이 살짝 떨리는 손과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는, 방금 전 그가 빌었던 소원의 간절함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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