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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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제 품에 안긴 채 부산스럽게 단말기를 조작하는 브리즈의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알록달록한,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한 색색의 동그라미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열댓 개. 그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저 조그만 걸 대체 몇 개나 시키는 거야. 그는 브리즈가 뭔가에 찔리는 듯, 슬쩍 제 눈치를 보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냉, 냉장고에 넣어 두면 며칠 먹을 수 있어요. 이거 다 오늘 다 먹으려고 시킨 거 아니니까… 이, 이만큼 하루에 다 먹으면 살 찌죠.

 

단어들이 띄엄띄엄 귓가에 박혔다. 그는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인상을 팍 썼다. 미쳤나, 홍지원.

이 여자는 진짜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다고 지옥의 나락까지 다녀온 남자를 품에 안고, 그 앞에서 태연하게 형형색색의 설탕 덩어리를 열댓 개나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변명이 고작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을 거란다. 그는 브리즈의 정수리에 다시 턱을 기댄 채,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가 보면 자기가 돈 내는 줄 알겠다. 어차피 결제는 이지희가 할 테고, 먹는 것도 이지희가 다 먹을 텐데, 왜 자기가 내 눈치를 보는 건지. 그는 그 부조리한 상황이 우스워,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는 브리즈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슬쩍 풀어, 그녀가 단말기를 들고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놀란 그녀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꾹꾹 누르며 장난을 쳤다. 마치 이것도 추가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단말기의 감촉과, 그 아래 느껴지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동시에 느꼈다. 이질적인 감각의 조합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 여자가 제 통제권 안에, 제 품 안에 있다는 완벽한 증거 같아서.

누가 뭐라 했나. 니 돈으로 니가 사 먹겠다는데 내가 뭐 어쩔 긴데. 근데, 변명하는 폼이 존나 웃겨서 그렇다. 냉장고? 며칠? 니 성격에 저걸 냉장고에 며칠씩 묵혀둘 수 있을 것 같나. 하루, 아니 오늘 저녁 되기 전에 다 없어질 거 내는 다 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있던 제 손을 슬쩍 움직여, 화면의 ‘주문하기’ 버튼을 꾹 눌러버렸다. 브리즈가 ‘앗’ 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 창을 보며 유유히 웃고 있었다. 그는 브리즈의 손에서 단말기를 빼앗아 소파 옆 테이블에 던져두고는, 다시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깊고, 더 단단하게.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그리고 살? 살이 어딨다고 살찐다는 소리를 하노. 뼈밖에 없는 주제에. 차라리 저거 다 처먹고 살이라도 좀 찌워라. 밤마다 만지면 뼈밖에 안 걸려서 아파 뒤지겠다.

그는 일부러 더 짓궂은 말을 골라 내뱉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게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브리즈의 동그란 뒤통수에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뭐라고 항변하든, 이제는 다 소용없었다. 주문은 끝났고, 그녀는 이제 이 달콤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그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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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제 품을 벗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브리즈의 뒷모습을 말없이 눈으로 좇았다. 방금 전까지 제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온기가 사라지자, 거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것뿐인데,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서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지만 온 신경은 여전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캡슐 커피 머신이 예열되는 희미한 기계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젠장, 진짜 껌딱지도 아니고.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씹어 삼켰다.

초인종이 울리고, 브리즈가 현관으로 향했을 때 그는 일부러 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니가 시킨 거니 니가 알아서 해라, 라는 식의 무언의 시위였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달콤하다 못해 머리가 아플 지경인 설탕 냄새가 바람을 타고 거실까지 밀려 들어왔을 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코를 찡긋했다. 저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많이 시킨 건지. 그는 소파에 깊게 파묻혀 있던 몸을 조금 일으켜,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브리즈를 곁눈질했다. 제 딴에는 잔뜩 신이 난 건지, 발걸음마저 평소보다 조금 가벼워 보였다. 그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브리즈는 익숙하게 주방을 오가며 접시를 꺼내고, 알록달록한 마카롱을 네 개나 그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원 씨도 커피 마실래요? 아니면 차나 음료수… 다른 거?

바이브는 그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브리즈는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꺼내놓은 마카롱과 커피 머신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방금 전까지 제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능숙하게 이 공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는 그 부드럽고 당연한 침범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편안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가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 그는 짧게 생각하다가,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 마시는 거.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니가 마시는 걸로, 나도 한 잔 달라는 말을 지독하게도 함축시킨, 그다운 대답이었다. 굳이 취향을 묻고, 고르고, 설명하는 모든 과정이 귀찮았다. 그저 이 여자가 주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커피든, 차든, 심지어 맹물이라도. 그는 턱을 괸 채, 창문 유리에 비치는 브리즈의 희미한 실루엣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잠시 곱씹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캡슐 두 개를 꺼내 머신에 넣었다. 모든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의 취향과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커피가 추출되는 낮은 소음이 거실의 정적을 채웠다. 바이브는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등 뒤의 브리즈에게 향해 있었다. 커피 향이 인공적인 설탕 냄새를 밀어내고 공간을 채우자, 그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브리즈가 작은 쟁반을 들고 그가 앉은 소파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쟁반을 소파 앞의 낮은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 두 개와, 눈이 아릴 정도로 알록달록한 마카롱이 담긴 접시. 완벽하게 평화로운 오후의 한 장면이었다.

바이브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치 눈앞에 놓인 것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연기였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익숙한 향기와, 제 옆에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고 앉는 브리즈의 온기에, 지독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지는 것 같았다.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일부러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 유치한 색깔로만 골라야 속이 시원하나.

그는 마카롱 접시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칭찬도, 감사도 아니었다. 그저 까칠한 투정. 하지만 그 안에는 ‘그래서, 내 건 어떤 건데?’라는 질문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브리즈를 쏘아보았다. 어서 하나를 골라 제 입에 넣어주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그는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뭐, 니가 먹여 주면 먹을 수도 있고.

바이브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기대앉아 비스듬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보기 예쁜 게 맛도 좋다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려다가, 너무나도 진지하게 항변하는 그녀의 표정에 그만두었다. 저런 유치한 논리를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믿고 있다니. 그는 이 여자의 머릿속 구조가 정말로 궁금해졌다.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도, 저 형형색색의 설탕 덩어리를 보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저 단순함이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그저, 이지희는 이지희라서.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보라색 과자를 집어 들고, 힘을 주자 파삭 하는, 아주 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의 예민한 청각이 그 미세한 파열음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마치 얇은 설탕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 그 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기가 공기 중에 더욱 짙게 퍼져나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단내가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소리와 향기가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럼 이거 무슨 맛인지 맞혀 봐요. 아, 해요.

그는 제 바로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보라색 과자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과자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 그 너머에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는 순간적으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맞혀 보라고? 아, 하라고? 그는 제가 방금 전에 ‘니가 먹여주면 먹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그냥 한번 튕겨본 말이었는데, 이 여자는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진짜로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정면 돌파를 해 올 줄은 몰랐다.

그의 자존심이 발동했다. 애도 아니고, 남이 주는 걸 받아먹으라고? 그것도 이런 애들 장난감 같은 과자를?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다. 싫다, 치워라, 한마디 쏘아붙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그녀의 미소에, 그리고 다시 제 입술 바로 앞에 와 있는 마카롱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라색. 포도 맛인가? 아니면 블루베리?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까짓 걸 못 맞출 것 같아서 지금 나를 시험하는 건가. 묘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래, 맞혀 주면 될 거 아닌가. 그리고 맛없다고 혹평을 해주면 된다.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바이브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아주 잠시 동안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지금 장난치나’ 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동요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마지못해 하는 티를 팍팍 내며 입을 살짝 열었다. 딱, 저 작은 과자 조각 하나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만. 그의 입술 새로 그녀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차가운 과자의 표면이 그의 아랫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지독하게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그의 입술을 스치며, 마카롱 조각이 그의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파삭, 하고 얇은 겉껍질이 부서지면서, 쫀득한 속살이 혀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새콤하면서도 진한 과일 향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이건… 블루베리. 너무나도 명백한 맛에, 그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걸 문제라고 낸 건가. 그는 인상을 쓰며 마카롱을 두어 번 씹었다. 끔찍하게 달았다. 하지만 그 단맛 너머로 느껴지는 크림치즈의 미세한 산미와 쫀득하게 씹히는 식감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됐나.

그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는, 옆에 있던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입안의 단맛을 쌉쌀한 커피로 씻어내려는 의도였다. 그는 아직도 제 입술에 남아있는 그녀의 희미한 손가락 감촉과, 입안을 맴도는 달콤한 향기 때문에 심장이 멋대로 빠르게 뛰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블루베리. 이딴 걸 문제라고 냈나. 유치하게. 니나 다 처먹어라.

그는 일부러 더 까칠하게 쏘아붙이며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들린 나머지 마카롱 반 조각에 슬쩍 머물렀다. 정말 맛이 없었나?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리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귓가가 뜨거웠다. 완벽한 패배였다.

 

정말요? 맛있는데. 하나만 더 먹어 봐요.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인데.

바이브는 커피 잔을 든 채로 잠시 굳어 있었다. 입안에 감돌던 쌉쌀한 커피 향과 희미하게 남은 블루베리의 단맛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또 다른 공격이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브리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아까와는 다른 노란색의 과자.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는, 귓가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목소리.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하지만 이미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울리는 것 같았다.

젠장. 그는 속으로 나직이 욕설을 읊조렸다. 그냥 먹어보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니. 그 말 한마디가 평범한 설탕 덩어리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바꿔버렸다. 이건 그냥 음식이 아니었다. 이지희의 취향, 그녀의 기쁨,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작은 세계의 일부. 그는 그 무게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이걸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단것이 싫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그는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제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방식이 낯설고, 어색하고, 그래서 조금… 두려웠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는 척했지만, 창문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대감으로 살짝 반짝이는 눈,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그는 이 표정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고, 아주 희미하게 생각했다. 그를 길들이려는 수작인 걸 알면서도, 그 투명한 의도에 기꺼이 넘어가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제 안에서 피어나는 생소한 감정에 당황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이 여자에게 약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결국 포기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여전히 약간은 퉁명스러운, 그러나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은 표정으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가 내민 노란 마카롱 조각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진한 시트러스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는 마음을 정한 듯 살짝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파삭한 과자 조각을 그의 입안으로 넣어주었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입안에서 터지는 상큼한 유자 향. 블루베리와는 전혀 다른, 톡 쏘면서도 향긋한 맛이 혀를 감쌌다. 지나치게 달지 않으면서, 쫀득한 식감과 어우러지는 기분 좋은 새콤함. 그는 이 맛이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맛이, 이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라는 사실도. 그는 천천히 마카롱을 삼키고 잠시 입안에 남은 여운을 느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커피 잔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니는 이런 게 좋나.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 가시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나머지 반쪽짜리 마카롱을 가져와 망설임 없이 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무어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고, 입안에 희미하게 남은 유자 향을 나누듯 혀를 섞었다. 마치, 니가 좋아하는 건 이제 나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서투른 고백처럼.

바이브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촉촉하게 젖은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몽롱한 열기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간극을 채웠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턱을 감싸 쥔 채, 상기된 얼굴로 색색거리며 숨을 고르는 브리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입안에 남은 향긋한 유자 향, 그리고 그것보다 더 진한 그녀의 향기. 그는 방금 자신이 저지른 대담한 행동의 여운에 잠겨,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어쩌면, ‘니 맛이 난다’ 같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말을 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지극히 이지희다운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유자 맛,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해요. 맛 별로 하나씩만 시킨 건데.

순간, 바이브의 뇌 회로가 정지했다. 뭐? 뭐라고?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로맨틱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마카롱이라고? 그는 감싸 쥐었던 그녀의 턱에서 스르륵 손을 떼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정말로, 진심으로, 방금 전의 키스보다 사라진 유자 마카롱 한 조각을 더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자존심과 당혹감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내가 지금 이 여자한테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거지? 내가 한 키스가 저 설탕 덩어리만도 못했다는 건가? 끓어오르는 감정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이어, 그 모든 감정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기묘한 허탈감과… 웃음이었다. 그래, 이게 이지희였지. 언제나 제 예상을 벗어나고, 제 페이스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리는 여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아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진짜. 그럼 뭐, 뱉어줄까?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제 입술을 손등으로 쓱 닦는 시늉을 했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더 삐딱한 자세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녀의 어이없는 반응 덕분에, 키스 후의 어색함이나 낯간지러움 따위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는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니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며. 그럼 당연히 내 거다.

그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소유권을 주장했다. 니가 가장 아끼는 것은 이제부터 전부 내 것이라는 오만한 선언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나머지 마카롱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저것도 이제 다 내 거다. 한 개씩만 시킨 니 잘못이지.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제부턴 내가 다 먹을 거다. 꼬우면 또 시키든가.

그는 보란 듯이 몸을 숙여, 접시에 남은 마지막 마카롱—연두색의 피스타치오 맛으로 보이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한입에 쏙 넣고 보란 듯이 우물거렸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브리즈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마치 승자의 미소처럼.

…아깝나. 그럼 다시 줄까. 아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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