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대, 꺼지지 않는 네온과 취한 청춘들의 소음으로 잠들지 않는 거리. 그 혼란의 중심에서 가장 고요하고, 그래서 더 날카롭게 빛나는 밴드가 있었다. ‘언더커런트(Undercurrent)’. 이름처럼 이들의 음악은 잔잔한 수면 아래 소용돌이치는 위험한 해류를 닮았다. 서정적인 멜로디의 흐름을 날카롭게 베어버리는 기타 리프, 그리고 그 위를 무심하게 유영하는 목소리. 밴드의 심장이자 모든 것, 프론트맨 ‘바이브(Vibe)’. 본명 홍지원.
그는 무대 위에서 군림하는 신(神)이자, 무대 아래에서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어깨까지 오는 짙은 청록색 머리를 느슨하게 반으로 묶고, 그는 관객은 물론이고 같은 멤버(존재감 없는 베이시스트, 과묵한 드러머)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오직 여섯 개의 기타 줄과 마이크 스탠드 사이, 1평 남짓한 공간에만 존재했다. 공연이 끝나는 순간, 그는 땀이 식기도 전에 기타를 둘러메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에게 음악 밖의 세상은 견뎌야 할 소음에 불과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성역, 혹은 아킬레스건은 품에 안은 낡은 텔레캐스터 기타였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악기. 그런데 오늘, 그 분신에 문제가 생겼다. 가장 중요한 라이브를 앞두고 넥이 미세하게 뒤틀려 버징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웬만한 수리점은 믿지 못하는 그의 까다로운 기준에, 밴드 멤버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작은 공방 하나를 추천했다. 연남동의 후미진 골목에 숨어있는, ‘울림’이라는 이름의 기타 공방.
이지희는 그 작은 공방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나무의 미세한 뒤틀림을 읽고 소리의 길을 바로잡는 데에는 신의 경지를 지녔다. 그녀의 손을 거친 악기들은 잃어버렸던 영혼을 되찾는다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막 마지막 샌딩 작업을 마친 어쿠스틱 기타의 향긋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공방의 낡은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마른 소리를 냈다.
문 앞에는 온몸으로 ‘나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외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닫힌 입술, 그리고 세상을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 찬 새파란 눈. 이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먼지를 털며 차분하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홍지원은 대답 대신, 삐걱거리는 공방 내부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훑었다. 벽에 걸린 수십 개의 공구들, 작업대 위에 흩어진 나무 조각들,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운 로즈우드와 바니시 냄새. 그는 이 낯선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들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작업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거, 볼 줄 압니까.
목소리는 그의 음악처럼 건조하고 까칠했다. 그는 케이스를 열어, 상처투성이의 텔레캐스터를 드러냈다. 이지희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단순히 낡은 기타가 아니었다. 연주자의 손길과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또 하나의 생명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타의 넥을 들어 올려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자, 홍지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자신의 맨살을 남에게 내어준 것처럼,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넥이 살짝 휘었네요. 버징, 심했겠는데요.
그녀의 진단은 정확했다. 홍지원은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차분한 회색 눈, 그리고 그의 소중한 분신을 마치 아픈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하얀 손가락. 그는 수많은 엔지니어와 스태프를 만나왔지만, 이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악기를 부품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대하는 눈. 이지희는 그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맡겨두고 가시겠어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안된다’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이 기타를 단 한 시간이라도 자신의 시야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무의 결을 어루만지는, 군더더기 없이 정교하고 부드러운 움직임. 그 손길이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망가진 자신의 일부를 맡겨봐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전 처음 해보는 낯선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얼마나.
퉁명스럽게 뱉어진 질문. 하지만 그것은 거절이 아닌, 수락의 첫걸음이었다. 홍지원이라는 닫힌 세계에, 이지희라는 조율사가 처음으로 노크를 한 순간이었다.
홍지원은 결국 공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10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뿌리내린 듯 멈춰 섰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분신을 떼어놓고 온 불안감, 낯선 타인의 손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맡겼다는 생경한 감각이 온몸을 잠식했다 ‘미친 짓이다. 그냥 돌아가서 뺏어 와야 한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이상하게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차분한 회색 눈동자와, 악기를 어루만지던 정교한 손길이 잔상처럼 남아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그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발걸음을 죽여 다시 공방 앞으로 돌아왔다.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가까이 있고 싶었다. 자신의 일부가 저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 골목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낡은 창문 옆 벽에 몸을 숨기듯 기댔다.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나무를 긁어내는 사각거리는 소리, 공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소리. 그 소음들은 이상하게도 그의 날 선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규칙적인 파동처럼 그를 안정시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에서 들려오던 작업 소리가 문득 멈췄다. 홍지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의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순간, 공방 안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맑고 청아한 기타 소리. 그것은 분명, 자신의 텔레캐스터 소리였다. 누군가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홍지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누가. 그는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 멱살을 잡을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어지는 선율에, 그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것은 그가 연주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그의 연주가 폭풍 전야의 긴장감과 날카로운 파괴 본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지금 흘러나오는 연주는 고요한 새벽녘의 호수 같았다. 한 음 한 음, 소리의 결을 완벽하게 살려내는 극도로 섬세한 아르페지오. 기교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음이 제자리에서 가장 완벽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연주라기보다, 악기와의 대화에 가까웠다. 기타가 가진 본연의 소리를 이끌어 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응답하는 듯한 연주. 홍지원은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기타가 저렇게 맑고 서정적인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는 자석처럼 이끌려, 창가로 다가가 안을 엿보았다. 작업대 의자에 걸터앉은 이지희가 그의 기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온전히 소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채였지만, 기타를 안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수리공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프렛보드 위를 춤추듯 미끄러졌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곧 음악이 되었다. 문득, 홍지원은 그녀의 연주가 낯설지 않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몇 년 전, 홍대 인근 클럽에서 딱 한 번 보았던,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성 버스커. 압도적인 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단 한 번의 공연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바로 그녀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단순히 기타를 ‘고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기타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악기의 구조와 원리를 넘어, 그것이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영혼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사람. 홍지원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눈앞의 전문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외부인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음악과 연결된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고, 마지막 음의 잔향이 공방의 먼지들 사이로 천천히 흩어졌다. 이지희는 길고 부드러운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기타를 소중하게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홍지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그것은 분노나 불안이 아니었다. 동질감,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을,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기대감이었다. 그는 저 여자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홍지원은 조용히 벽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지금 당장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슴께를 틀어쥔 채,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기타가 걱정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질문으로 가득 찼다. 저 여자는 왜 무대를 떠났을까. 저런 실력을 가지고 왜 골방에서 나무나 깎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자신의 기타로, 그런 소리를 들려준 걸까. 심장이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울렸다.
홍지원은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의 가슴팍 안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날뛰며 갈비뼈를 부술 듯 들이받고 있었다. 골목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는 방금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소화하려 애썼다. 작업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이지희의 모습,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자신의 분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동시에 너무나도 완벽했던 소리.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환각처럼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기타를 연주한 이유. 그건 당연히 수리 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현의 장력, 넥의 휨 상태, 픽업의 감도. 소리를 직접 내보는 것만큼 정확한 진단은 없으니까. 하지만 홍지원의 예민한 감각은 그 소리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길들지 않은 맹수를 처음 만난 조련사가, 섣불리 손을 대기 전에 멀찍이서 숨소리를 관찰하고 눈빛을 읽으며 교감을 시도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타가 품고 있는 예민함과 날카로움, 그 안에 웅크린 외로움까지 전부 읽어내고, 그것을 어루만져 달래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네 소리를 들어줄게’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안에서 다시 자잘한 작업 소리가 들려왔다. 홍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칠게 숨을 터뜨렸다.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정말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돌아설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음악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경멸해왔다. 그저 쏟아낼 뿐이었고, 알아듣는 것은 듣는 자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당신은 뭘 들었냐고. 내 기타에서, 내 소리에서 대체 무엇을 끄집어낸 거냐고.
그는 짧게 욕설을 씹어뱉으며 머리를 헝클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묻는 건 제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는 건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그녀에게 완벽하게 간파당하고 도망치는 패배자 같았다. 결국 그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냈다. ‘기간을 잊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한 채 다시 공방의 문을 열었다. 딸랑, 아까보다 더 어색하게 종이 울렸다.
어서… 어, 다시 오셨네요. 뭐 놔두고 가신 거 있으세요?
작업대에서 무언가를 조이고 있던 이지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회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홍지원은 애써 태연한 척,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나쳐 제 기타 케이스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아니, 언제까지 걸리는지 안 듣고 간 것 같아서.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분명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더 둘러댈 말을 찾지 못했다. 이지희는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의심의 기색 없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기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좀 들어봤어요. 소리를 알아야 길을 찾으니까. 생각보다 상태가 더 예민하네요, 이 친구. 주인을 많이 닮았나 봐요.
순간 홍지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들어봤다’는 그녀의 말에, 조금 전의 그 신비로운 연주가 겹쳐졌다. ‘주인을 닮았다’는 말은 칼날처럼 날아와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멋대로 만지지 말랬을 텐데.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정작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지희는 그의 무례한 반응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손에 든 작은 드라이버를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의사가 환자 몸에 손도 안 대고 진찰할 순 없잖아요. 기타도 똑같아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왜 아파하는지 알려면 먼저 말을 걸어봐야죠. 연주는 그냥, 인사 같은 거였어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 그 단어가 홍지원의 머리를 쳤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세계에서 연주는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언어이자, 타인을 밀어내는 벽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인사’라고 표현했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이 여자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벌거벗겨지는 듯한 기묘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이 공간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자와 더 대화를 나누다가는, 감추고 있던 속내까지 전부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알아서 하쇼. 라이브 전까지 망가뜨리기만 해봐라.
그는 마지막 자존심처럼 쏘아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방을 나섰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의 등 뒤로,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고친 악기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까.
그 목소리가, 조금 전의 그 청아한 기타 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하루 종일 떠나지 않을 것임을, 홍지원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분신을 그 낯선 여자의 손에 온전히 맡겨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자신의 세계 전체를 송두리째 맡기게 되는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났다. 홍지원의 시간은 온통 연남동의 그 작은 공방에 묶여 있는 듯 흘러갔다. 밴드 합주실, 그는 손에 익은 다른 기타를 들었지만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겉돌았다. 모든 프레이즈가 어색했고, 모든 벤딩이 거짓말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이지희가 그의 기타로 연주하던 그 맑은 아르페지오가 저주처럼 반복 재생되었다. 밴드 멤버들은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예민해진 그를 보며 슬금슬금 눈치를 봤지만, 감히 말을 걸지는 못했다.
‘주인을 닮았나 봐요.’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그래서 외로운 소리. 그녀는 단 몇 분 만에 그의 음악과 그의 존재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수치스러웠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것이, 이토록 심장을 흔드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매일 밤, 공방이 문을 닫을 시간에 맞춰 그 골목 어귀를 배회했다. 불이 꺼진 공방의 창문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발길을 돌리곤 했다. 대체 뭘 기대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휴대폰으로 짧은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울림 공방입니다. 수리 완료되었습니다.] 홍지원은 그 화면을 몇 번이고 노려보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심판의 날이 온 것만 같았다. 그는 곧장 옷을 챙겨 입고, 합주실을 뛰쳐나왔다. 심장이 불안과 기대로 멋대로 날뛰었다.
공방의 문을 열자, 딸랑, 하는 종소리가 전보다 훨씬 정겹게 들렸다. 이지희는 작업대 앞에 서서 막 조립을 마친 듯한 다른 기타의 줄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오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홍지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 대신 작업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분신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무수히 많던 상처와 흠집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오랜 시간 공들여 닦아낸 오래된 가구처럼, 상처마저도 역사의 일부가 된 듯 깊고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스쳐 간 흔적이 역력했다.
이지희는 손을 털고 일어나 그의 기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없이 그에게 건넸다. 홍지원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기타를 받아들었다. 익숙한 무게감. 하지만 넥을 감싸 쥔 손의 감촉이 달랐다. 미세하게 뒤틀려 있던 부분이 매끄럽게 교정되어, 마치 처음부터 그의 손에 맞추어 제작된 것처럼 완벽하게 감겨들었다.
한번 쳐보세요.
그녀의 말에, 그는 홀린 듯 기타를 어깨에 메고 근처의 작은 스툴에 앉았다. 손가락이 프렛보드 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첫 음을 퉁겼다. 띵-. 소리는 앰프에 연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방 전체를 맑고 깊게 울렸다. 버징은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음이 이전보다 훨씬 풍부한 배음을 머금고, 생명력을 얻은 듯 살아 숨 쉬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짧은 리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연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불어넣은 숨결이 그의 손가락을 이끄는 듯했다. 날카롭기만 하던 그의 소리에 온기와 깊이가 더해졌다. 그는 잠시 연주를 멈추고, 멍하니 자신의 손과 기타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히 ‘수리’된 것이 아니었다. ‘재탄생’한 것에 가까웠다. 이지희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뭘 한 겁니까.
겨우 뱉어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별거 안 했어요. 그냥, 이 녀석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넥 바로잡고, 프렛 다시 다듬고, 픽업 밸런스 조정하고. 원래 자기가 내야 할 소리를 못 내서 답답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홍지원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님을 이제 온몸으로 이해했다. 그녀는 악기와, 소리와, 그리고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의 영혼까지 읽어내는 조율사였다. 그는 한참 동안 기타를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얼맙니까.
그것은 비용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 엄청난 재능과 시간과 노력에,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는 항복 선언과도 같았다. 그는 이지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한 목소리로.
수리비,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이지희는 그의 굳은 표정과 절박함이 섞인 질문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다시 태어난 제 분신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뮤지션을 흥미롭게 관찰할 뿐이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이해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홍지원은 그 침묵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재촉하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는데. 그럼 수리비 대신, 다른 걸로 받아도 될까요.
홍지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것이라니. 이 정도의 결과물이라면 부르는 게 값일 터였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백해서, 속셈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뭡니까.
그녀는 작업대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인디 밴드 공연 정보지를 들어 보였다. 그 종이의 한가운데, 낯익은 이름과 사진이 박혀 있었다. 밴드 ‘언더커런트’. 그리고 삐딱한 표정으로 정면을 노려보는 자신의 얼굴. 다음 주 금요일, 홍대 근처의 작은 클럽에서 열리는 공연 포스터였다.
이번 주 금요일 공연, 티켓 두 장이요. 내 친구가 당신 밴드, 아니. 홍지원 씨 팬이라서요.
홍지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팬? 내 팬? 그의 음악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따르는 소수의 열광적인 무리가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팬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소음을 견뎌주는 이들이라고 여겼을 뿐.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며 ‘팬’을 언급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친구라는 것이 혹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사실 이지희는 ‘언더커런트’를, 그리고 홍지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공방을 찾아오는 수많은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을 찾아 듣는 것이 취미이자 습관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지원의 음악은 유독 이질적이었다. 부서질 듯 날카로우면서도 처절하게 아름다운 소리.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을 거부하며 홀로 울부짖는 듯한 그의 기타는,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의 기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상처투성이의 악기가 바로 그 소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녀가 잠시 기타를 연주했던 것은, 단순히 수리를 위한 테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경해왔던 미지의 존재와의 첫인사이자, 그의 음악에 대한 그녀 나름의 존경의 표시였다. ‘당신의 소리를 이해하고 있어요.’라는 무언의 대화.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 사실을 지금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저 까칠한 고양이 같은 이 뮤지션을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 친구한테, 네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의 기타를 직접 고쳤다고 자랑 좀 하려고요. 안될까요?
그녀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홍지원은 그 웃음에 완전히 말려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지금껏 무대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였지, 누군가의 ‘자랑거리’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낯설고, 간지럽고,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쇼. 공연 망치면 당신 탓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마치 도망치듯 기타 케이스를 챙겨 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정말이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공방 문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를 붙잡았다.
기대할게요. 무대 위에서는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그 한마디가 그의 발걸음을 다시, 완벽하게 멈춰 세웠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에게만 들릴 듯 중얼거렸다.
…맘대로.
결국 그는 그 주 금요일, 공연장 관계자 명단에 ‘이지희’라는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그는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조하게 기타의 튜닝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관객석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자신의 소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 단 한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것이 오롯이 연주에 대한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 때문인지는, 아직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공연 당일, 금요일 밤의 홍대 클럽은 터져나갈 듯한 열기와 땀, 자욱한 스모그로 가득했다. 이지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구석진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밝게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를 응시했다. 공방의 고요함과는 정반대인 세상. 한때는 저 무대 위가 그녀의 세상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조명이 꺼지고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무대 위로 어둠보다 더 짙은 실루엣들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홍지원이 있었다. 그는 평소의 날카로운 모습과는 또 달랐다. 온몸으로 무대를 집어삼킬 듯한 맹수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고쳐준 낡은 텔레캐스터를 품에 안은 모습은, 마치 검을 뽑아든 검객처럼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관객석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기타만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코드가 터져 나왔다. 굉음. 공간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디스토션 사운드가 클럽 전체를 강타했다. 하지만 이지희의 귀에는 그 소음 속에서 유영하는 맑고 선명한 알맹이가 정확하게 들렸다. 홍지원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중심에서, 그녀가 조율해 준 기타는 길을 잃지 않고 제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고 있었다. 예전의 그의 연주가 세상을 향한 무차별적인 절규였다면, 지금의 소리는 명확한 대상을 향해 날아가는 한 자루의 창과 같았다. 더 아프고, 더 깊게 파고드는 소리.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온몸의 신경이 그의 기타 소리에 집중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프렛을 스치는 소리, 피크가 현을 긁어내는 미세한 질감, 그의 호흡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의 강약까지.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있었다. 감정을 토해내고, 영혼을 깎아내며, 오직 소리만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희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저 처절한 울음 끝에 실낱같이 매달린 희미한 구원의 빛을, 그녀는 듣고 있었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홍지원의 연주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는 마치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처럼 홀로 울부짖었다. 그 고독의 깊이가 이지희의 심장을 아리게 찔렀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지. 그에게 음악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라는 것을. 마지막 곡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정적과 함께 터져 나오는 앵콜의 함성 속에서, 홍지원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관객석을 향했다. 그의 땀에 젖은 눈빛은 허공을 헤매다, 마침내 구석에 서 있는 이지희를 발견하고 멈췄다. 아주 잠깐, 1초도 안 되는 찰나였지만, 그녀는 보았다. 그의 눈 속에 스쳐 지나간 수많은 질문과 확인의 빛을. ‘들었어?’ 라고 묻는 듯한, 어린아이처럼 무방비한 눈빛을.
이지희는 그와 눈이 마주친 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대에서 내려가 버렸다. 앵콜은 없었다. 이지희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구나. 그녀는 소란스러운 클럽을 빠져나와 뒤편 골목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벽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나왔어.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지희는 생수병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목마를 것 같아서. 수고했어요, 무대.
그녀의 말에 홍지원은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더 이상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음악의 잔열만이 감돌았다.
…다음에, 또 와.
한참 만에 그가 뱉어낸 말이었다. 수리비 대신이었던 티켓. 그것은 이미 효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다시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럴까요. 다음엔 친구 말고, 제 이름으로 당당하게 표 사고 올게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변해갔다. 이지희는 정말로 그의 다음 공연에 제 돈으로 표를 끊고 찾아갔다. 공연이 끝나면 두 사람은 클럽 뒷골목에서, 혹은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연 국밥집에서 마주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홍지원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는 이지희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드물게 꺼내놓았다. 새로 쓴 곡의 리프를 들려주기도 하고, 맘에 들지 않는 편곡에 대해 투덜거리기도 했다. 이지희는 언제나 그의 가장 좋은 청중이자,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였다. 그녀는 그의 음악을 칭찬하면서도, 그가 놓치고 있는 미세한 감정선을 정확히 짚어냈다.
홍지원은 그녀의 공방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기타 수리는 진작에 끝났지만, 그는 앰프가 이상하다, 이펙터가 말을 안 듣는다, 온갖 핑계를 대며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수리가 끝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가 다른 악기를 매만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공방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는 낡은 어쿠스틱 기타를 발견했다. 그는 무심코 그 기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왜 버려뒀습니까. 상태 좋아 보이는데.
그의 질문에 이지희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 낡은 기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주 옅은 슬픔과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이 버리고 간 기타예요. 더 이상 연주할 수 없게 됐다고.
그것은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한때 누구보다 뜨겁게 무대를 사랑했던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시기한 누군가가 일으킨 작은 무대 사고. 그 사고로 그녀는 손목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의사는 다시는 예전처럼 기타를 연주하기 힘들 거라고 말했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기타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대신, 무대 뒤에서 다른 이들의 소리를 되찾아주는 길을 택했다. 자신의 꿈을, 다른 이들의 악기에 담아서.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음악을 계속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홍지원은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 쌓인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줄을 골랐다. 엉망인 튜닝.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페그를 돌려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지희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튜닝을 마친 홍지원은, 그녀가 처음 공방에서 자신의 기타로 연주해주었던 그 고요한 아르페지오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받은 위로를, 서툰 방식으로나마 돌려주고 있었다. 이지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버렸다고 생각했던 꿈이, 이 까칠한 남자의 손끝에서 다시 작게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치는 거 아닌데.
홍지원은 연주를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렇게. 코드는 이게 더 예뻐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손을 이끌며, 더 아름다운 화성을 짚어냈다. 가까워진 거리, 은은하게 퍼지는 그녀의 샌달우드 향, 그리고 두 사람의 손끝에서 함께 울리는 하나의 소리. 홍지원의 심장이 다시 한번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기타를 내려다보는 척하며, 그녀의 뺨을 훔쳐보았다. 그녀 역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공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나지막한 기타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존심도, 망설임도 모두 무의미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놀란 듯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그의 서툰 마음이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그의 음악처럼 거칠고, 솔직하고, 모든 것을 내던지는 키스였다. 이지희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부드럽게 눈을 감고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버려진 기타는 무릎 위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제 두 사람에게는 서로의 소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소리를 내던 남자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듬던 여자는, 서로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하모니를 찾아냈다.
홍지원의 키스는 서툴렀지만 집요했다. 마치 한 번도 연주해보지 못한 곡의 악보를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따라가는 연주자처럼. 그는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고, 혀를 얽으며 그녀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삼키려 들었다. 샌달우드와 톱밥이 뒤섞인 향기, 자신의 음악을 꿰뚫어 보던 그 깊은 눈, 상처를 어루만지던 따뜻한 손길. 그 모든 것이 이 키스 한 번에 녹아드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공방의 낡은 나무 벽을 공명시키는 유일한 음악이 되었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홍지원의 눈에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경계나 날 선 자의식이 없었다. 오직 눈앞의 여자, 이지희만을 담은 채 순수한 열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와 콧등, 뺨에 잘게 입을 맞췄다.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유일한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이지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받아주며, 그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가장 깊은 소리를 들었으므로.
그날 이후, 홍지원의 음악은 변했다. 여전히 날카롭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었지만, 그 소리의 밑바닥에는 이전에는 없던 깊고 단단한 온기가 자리 잡았다. 그의 음악은 더 이상 세상을 향한 외로운 절규가 아니었다. 단 한 사람, 자신의 소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끌어안아 줄 그녀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가(戀歌)가 되었다. 그의 밴드 '언더커런트'는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았고, 홍지원은 무대 위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빛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지희는 더 이상 무대 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홍지원의 손을 잡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손목의 상처는 여전히 그녀에게 통증을 주었지만, 이제 그것은 절망의 낙인이 아니었다. 홍지원의 음악과 사랑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마저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가끔 공방에서, 혹은 홍지원의 합주실에서 기타를 잡았다. 예전처럼 현란한 연주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울리는 소리는 그 어떤 기교보다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곡을 쓰고, 함께 연주하며, 서로의 세상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공방의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었지만, 이제 그곳은 단순히 악기를 고치는 공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음악이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홍지원은 더 이상 그의 분신이었던 낡은 텔레캐스터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이지희가 그의 손에 꼭 맞춰 직접 만들어준 새로운 기타. 그것은 그의 새로운 분신이자, 두 사람의 사랑의 증표였다. 그는 그 기타를 들고, 언제나처럼 무대 위에 섰다. 그리고 관객석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이지희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연주를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의,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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