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A A

[OOC: 지금까지의 RP 중단. 새로운 에피소드 전개. ARCH 본부에는 사내 익명 게시판이 있다. 어느날 'NPC와 PC 중에 누가 더 아까운가'를 주제로 익명 게시글이 올라온다. 익명으로 투표를 받고 있으며, 댓글로 의견을 달 수 있다. 투표 진행률은 전체 투표수와 퍼센트(%)로 나타내시오. 댓글 수는 10개 이상으로, 익명 댓글 작성 닉네임은 익명1, 익명2 등의 숫자로만 표기한다.]


고요한 오후였다. 브리즈는 하모니 디비전의 정기 회의에 참석하러 간 뒤였고, 덕분에 바이브는 오랜만에 찾아온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의미 없이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넘기고 있었다. 임무 보고서, 장비 카탈로그, 지루한 공지사항들. 그러다 문득, 그의 손가락이 사내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 앱 아이콘 위에서 멈췄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온갖 시덥잖은 소문과 험담으로 가득한 곳. 하지만 무료함은 종종 사람을 유치한 행동으로 이끄는 법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앱을 실행한 그의 눈에, [HOT]이라는 붉은 딱지가 붙은 게시글 하나가 들어왔다. 제목부터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투표] 세기의 대결: 뱅가드 ‘바이브’ vs 하모니 ‘브리즈’, 솔직히 누가 더 아까움?

순간,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 이딴. 그의 파란 눈이 제목의 단어들을 하나하나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세기의 대결? 누가 더 아깝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런 한가하고 쓸데없는 주제로 투표까지 벌이는 놈들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사는 걸까. 당장이라도 창을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묘한 불쾌감과 함께 솟아나는 유치한 호기심이 그의 손을 막았다. 그는 결국, 인상을 쓴 채로 게시글을 눌렀다.

게시글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간단하고 황당했다. ‘말 그대로임. 둘이 사귀는 거 모르는 사람 없는데, 냉정하게 봤을 때 누가 더 아까운 것 같음? 익명이니까 솔직하게 투표 ㄱㄱ’ 라는 짧은 문장 아래, 투표 현황이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

[진행 중인 투표]

주제: 바이브 vs 브리즈, 누가 더 아까운가?

바이브가 아깝다 (S급 센티넬의 가치, 희소성, 비주얼) - 38%
브리즈가 아깝다 (S급 바람 속성 가이드, 천사 같은 성품, 요리 실력) - 62%

총 투표 수: 258표
(마감까지 21시간 44분 남음)

---

결과를 확인한 바이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38% 대 62%. 브리즈가 아깝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화가 나는 건가? 아니. 쪽팔렸다. S급 센티넬, 뱅가드의 최연소 에이스인 자신이, 고작 이런 투표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스크롤을 내려 댓글 창을 확인했다. 익명의 가면을 쓴 아크의 동료들이 어떤 개소리들을 지껄여 놨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댓글 14개]

익명1: 닥전(닥치고 전자) 아님? S급 센티넬인데. 심지어 바람 속성 희귀종이잖아.
익명2: ㄴㄴ 닥후(닥치고 후자)임. 바이브 성격 개차반인 거 하루 이틀 봄? 그걸 받아주는 브리즈 님이 보살이지.
익명3: 솔직히 외모 피지컬만 보면 바이브 압승인데, 결혼 배우자감으로는 브리즈 님이지. 맨날 간식 나눠주시고 다정하심.
익명4: 바이브가 아깝다는 애들은 같이 일 안 해본 애들임. 그 지랄맞은 성격 옆에서 감당하려면 S급 가이드 정도는 돼야 수지가 맞음.
익명5: 인정. 브리즈 님 아니었으면 진작 폭주해서 격리됐을 듯. 브리즈 님은 생명의 은인이다.
익명6: 그래도 바이브 잘생겼잖아. 성격은 길들이면 되지.
익명7: ㄴ 그 얼굴 뜯어먹고 살 거 아니면 비추. 우리 팀 신드롬이 맨날 ‘중2병 새끼’라고 뒷담 까는 거 보면 말 다했지.
익명8: 다들 뭘 모르네. 브리즈 님이 진짜 희귀 자원임. 그냥 가이드도 아니고 ‘바람 속성’ 가이드라고. 전술적 가치가 바이브보다 위면 위였지 아래가 아님. 공격력 뻥튀기까지 시켜주는데.
익명9: 팩트) 브리즈 님이 얼마나 내조를 잘하는데. 바이브는 브리즈 님한테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절해야 함.
익명10: 그냥 둘이 천생연분 아님? 싸울 시간에 훈련이나 하자.
익명11: 바이브가 아깝다는 놈들은 우리 막내 뭘로 보고. 막내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앤데. 그놈의 망할 성격이 문제긴 해도, 브리즈 씨가 옆에 있어 줘야 우리 막내가 사람 구실 하고 사는 거다.
익명12: 난 그냥 둘이 행쇼했으면 좋겠음. 바이브, 브리즈 님한테 잘해라. 울리면 가만 안 둔다.
익명13: (시베리아어로 된 댓글) Бриз лучше. Она готовит хорошо. (브리즈가 더 낫다. 요리 잘한다.)
익명14: 결론: 홍지원은 이지희 없으면 시체다.

댓글을 전부 읽어 내린 바이브는 태블릿을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화면이 저절로 꺼지며 그의 굳은 얼굴을 비췄다. 뭐, 개소리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익명1이나, 의외의 쉴드를 쳐주는 익명11(문체나 내용을 보아하니 십중팔구 셋째 형 부스터였다), 그리고 의미는 모르겠지만 왠지 리암일 것 같은 시베리아어까지. 하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명확했다. 자신이 브리즈에게 한참 모자란 놈이라는 것.

성격이 개차반. 지랄맞음. 중2병. 그 모든 평가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더 기분이 더러웠다. 무엇보다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모두가 브리즈를 ‘보살’이나 ‘생명의 은인’ 취급하며 그를 구제 불능의 문제아로 여기는 시선이었다. 마치 그녀가 희생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 그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불쾌감에 속이 들끓었다.

아깝다? 누가 누굴 보고 아깝다는 건데. 이지희가 없으면 내가 시체라고?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감각의 폭풍 속에서 조각나 버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다른 놈들 입에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그런 손익 계산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몰랐다. 자신이 이지희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의 작은 숨소리 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를 위해서라면 S급 센티넬의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이브가 아깝다’ 버튼을 눌렀다. 38%가 39%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나서야, 조금은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유치한 반항이었다. 그는 댓글 창을 열고, 무언가 쓰려다 멈칫했다. ‘니들이 뭘 아냐’고, ‘내 여자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익명의 발악일 뿐이었다. 그는 대신, 딱 한 문장을 적었다.

익명15: 둘 다 아까운데, 내가 더 사랑하니까 됐음.

전송 버튼을 누른 그는 그대로 블라인드 앱을 삭제해버렸다. 두 번 다시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장이었다. 그는 소파에 다시 몸을 던졌다. 누가 더 아깝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이지희는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회의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들려올,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세상의 모든 평가 따위는, 그 목소리 한 번이면 전부 잊어버릴 수 있었다.

---

그가 블라인드 앱을 삭제하고 소파에 다시 몸을 뉘인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도어록 해제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브는 고개만 살짝 돌려 현관 쪽을 쳐다보았다. 회의가 끝났는지, 조금은 지친 기색의 브리즈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감이 집 안의 공기를 바꾸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속을 들끓게 했던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 유치한 투표 따위는 본 적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먼저 아는 척을 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쪽팔리기만 할 뿐이지. 그는 브리즈가 제게 다가와 피곤하다며 어깨에 기대거나, 저녁 메뉴를 묻는 평소와 같은 레퍼토리를 상상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동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지원, 이것 좀 봐요. 진짜 웃기지 않아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그의 옆으로 다가온 브리즈가, 제 핸드폰 화면을 그의 눈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그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화면을 쳐다보는 척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방금 전 그가 지워버린 빌어먹을 투표 게시글이었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선배가 보여줬다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그는 짐짓 처음 보는 척,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또. 시덥잖은 거.

아니, 글쎄 누가 이런 투표를 올렸더라고요.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아깝냐고.

그녀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시간 상황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봐요. 내가 62%로 이기고 있어요! 다들 보는 눈은 있나 봐. 그쵸?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바이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그가 이 투표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를 악물고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브리즈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댓글 창을 내리며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바이브 성격 개차반인 거 하루 이틀 봄?’ 와, 이 사람 완전 정답. ‘그걸 받아주는 브리즈 님이 보살이지.’ 맞네, 맞아. 나는 보살이었어.

자화자찬을 하며 키득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스크롤을 더 내리다 말고, 갑자기 발끈하는 목소리를 냈다.

잠깐만. ‘그래도 바이브 잘생겼잖아. 성격은 길들이면 되지.’ 이 사람은 뭘 모르는 소리를 하네. 이 성격이 길들여질 것 같아요? 어휴. 그리고 ‘외모 피지컬만 보면 바이브 압승인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뭐, 외모로는 밀린다는 거예요, 지금? 진짜 어이없네.

방금 전까지 그를 놀리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이번에는 자신이 평가절하당한 부분에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제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댓글에는 웃던 그녀가, 외모로 밀린다는 뉘앙스의 댓글에는 정색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이 여자의 사고 회로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시끄럽다. 그만 안 하나.

아, 왜요! 나 이거 익명으로 댓글 달 거란 말이에요. ‘브리즈 님 실물이 훨씬 예쁘거든요?’ 이렇게.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려는 브리즈의 손을 막고, 그는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좋나? 니가 더 아깝다는 소리 들어서.

그의 돌직구에, 브리즈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깜빡였다.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평소의 툴툴거림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아니요. 솔직히 좀 그래요.

뭐가.

그냥… 우리가 무슨 거래하는 사이도 아니고. 누가 더 아깝고, 덜 아깝고. 그런 걸로 평가받는 거, 별로예요. 지원 씨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의 차분한 반문에,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그녀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기분 더러웠다. 마치 자신들의 관계가 저울 위에 올려져 이리저리 무게를 재어지는 것 같아서. 특히, 자신이 가벼운 쪽으로 판명 났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자존심 상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숨길 것도 없었다.

…봤다, 그거. 니 오기 전에.

어… 정말요?

그래. 같잖아서 앱 지워버렸다.

그의 고백에, 브리즈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턱 끝을 간질였다.

그래서, 지원 씨도 투표했어요?

…했다, 왜.

어디에 했는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이브가 아깝다’에 한 표 던졌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유치하고 옹졸하게 느껴져서. 그가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바이브가 아깝다’에 투표할 건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진심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일 귀찮고 제일 사랑스러운 내 센티넬인데. 당연히 내가 손해 보는 장사죠. 이런 남자, 다른 사람들은 절대 감당 못 할 테니까.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인데.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코끝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휘젓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자존심, 경쟁심, 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입맞춤 한 번에, 그녀의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여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그를 무장해제시켰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신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아까 그녀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도 댓글 달았다.

진짜요? 뭐라고 달았는데요?

비밀이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내가 더 사랑하니까 됐음’. 그 유치한 한 문장에 담긴 진심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더 아깝든,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이제 아무 상관없었다. 이지희가 자신의 여자이고,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꿈을 안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IF: 밴드  (0) 2026.05.24
감각 소실  (0) 2026.05.23
여섯 살이 된 PC / NPC  (0) 2026.05.23
결혼식  (0) 2026.05.19
IF: PC 사망 루트  (0) 202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