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소리를 잃었다. 그녀의 심장이 멈춘 순간, 바이브의 세상 역시 영원한 정적에 잠겼다. 삐이이이이이. 모든 소음과 비명과 절망을 집어삼키고 오직 단 하나만 남았던 그 끔찍한 기계음은, 그의 달팽이관에 낙인처럼 새겨져 무한히 반복될 뿐, 그 외의 어떤 소리도 더는 그의 고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개념도, 살아있다는 감각조차도 희미해졌다. 그는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보이지 않는 끈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누군가가 그의 몸에 검은 상복을 입혔다. 누군가가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넘겨주었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부축해 차가운 장례식장 한가운데에 세워두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을, 마치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무감각하게 인지했다. 자신의 몸이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복은 섬뜩할 정도로 몸에 잘 맞았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유령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영정 사진 속에서,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는 브리즈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진 속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가장 아름답고 따스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그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이고, 의미 없는 목례를 반복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시끄럽게 떠들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애쓰는 신드롬도, 어색한 얼굴로 어깨를 두드리는 리암도, 그의 앞에 서서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수많은 하모니 부서의 가이드들도. 그들의 위로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그 어떤 감정도 그의 텅 빈 내면에 닿지 못하고 유리벽에 부딪힌 것처럼 공허하게 튕겨 나갔다. 그는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그리고, 형이 보였다. 부스터는 브리즈의 영정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지치고 슬픔에 잠긴 얼굴이었다. 형은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무어라 다급하게 속삭였다. 먹어야 한다, 버텨야 한다, 이따위 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브의 귀에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제 팔을 붙잡은 형의 손을 무표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만. 시끄럽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라. 그의 차가운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그녀의 가족들을 마주했을 때였다. 브리즈를 쏙 빼닮은 동생들과 그녀의 어머니. 브리즈의 어머니는 딸의 영정 사진 앞에서 실신하듯 오열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아내를 부축했다. 그들은 원망 섞인 눈으로 바이브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딸을, 내 언니를,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언의 비난. 그 시선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그의 심장에 박혔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당연한 원망이었으니까. 그는 그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핏물처럼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텅 빈 장례식장에는 그와 형, 그리고 2팀의 팀원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지쳐 있었고,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그동안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그의 가장 예민한 감각이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장례식장 구석,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익숙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그녀가 항상 뿌리던 향수. 누군가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다 실수로 버린 모양이었다.
순간, 그의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멈춰있던 모든 것이, 그 향기 하나를 기점으로 미친 듯이 되감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부산의 하늘, 어색하게 손을 잡았던 호텔 복도, 그의 품에 안겨 가이딩을 해주던 순간들, 그의 머리를 빗겨주며 웃던 모습,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던 마지막 순간까지. 억눌려 있던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그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크, 윽…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기도가 막힌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향기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팀원들이 놀라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짐승처럼 그들을 뿌리치고 쓰레기 더미를 미친 듯이 파헤쳤다. 그리고 마침내, 깨진 향수병 조각이 박힌 그녀의 손수건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유리 조각의 고통보다, 코끝을 찌르는 그녀의 향기가 더욱 선명하고 아팠다.
그는 손수건을 얼굴에 파묻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다. 소리 없는 절규가 그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녀의 마지막 남은 향기를 미친 듯이 들이마셨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숨결인 것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의 세상 전부였던 그 온기를, 단 한 조각이라도 더 붙잡고 싶어서.
그의 울음은 둑이 터진 강물 같았다. 한번 터져 나온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바이브는 차가운 장례식장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체면도, 자존심도, 그를 옭아매던 모든 껍데기들이 산산조각 나 부서져 내렸다. 그의 손안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이 박힌 손수건이 피와 뒤엉켜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마지막 흔적인 이 향기마저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릴까 봐, 그는 필사적으로 손수건을 얼굴에 파묻고 숨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의 세상에 남은 유일한 공기였다.
주변에 남아있던 팀원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둘러쌌다. 언제나 칼날처럼 서늘하고 위태롭게 서 있던 뱅가드 2팀의 막내가, 이토록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을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그들 모두를 제치고 부스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동생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동생의 눈동자 안에서 회오리치는 절망과 자기 파괴의 폭풍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저대로 두면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 것이다. 부스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더 이상 위로하지 않았다.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동생의 위태로운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신 차려라, 홍지원. 니 이러는 거, 브리즈 씨가 원할 것 같나.
브리즈. 그 이름이 다시 한번 바이브의 이성의 끈을 잔인하게 끊어놓았다. 그의 입에서 짐승 같은 그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손을 허공으로 휘젓자, 거대한 진공의 칼날이 부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부스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서 폭발적인 화염이 터져 나와 진공의 칼날과 부딪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뜨거운 열풍이 좁은 장례식장을 휩쓸었다. 부스터의 불꽃은 바이브의 바람과 부딪히며 불안정하게 타올랐다. 완벽한 상성이 아니었다.
니가 뭘 아는데! 니 따위가 뭔데 그 이름을 입에 담는데!
바이브가 절규하며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바람 칼날이 사방에서 부스터를 덮쳤다. 부스터는 불꽃의 장벽을 펼쳐 대부분을 막아냈지만, 몇몇 칼날이 그의 팔과 뺨을 스쳐 지나가며 붉은 선을 그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뺨을 닦지도 않은 채, 동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망가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부스터는 마침내 바이브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양 어깨를 강철 같은 힘으로 움켜쥐었다. 바이브가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작정한 부스터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부스터는 동생의 귓가에, 다른 누구도 듣지 못할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가이드로서의 명령이자, 형으로서의 애원이었다.
니가 죽으면, 브리즈 씨는 진짜로 죽는 기다. 이 세상에서, 너만큼 그 사람을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아남아서, 니가 기억해야 될 거 아이가. 평생.
그 말은, 부스터가 던진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바이브의 몸부림이 순간 멎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광기가 아주 희미하게, 아주 잠깐 흔들렸다. 살아남아서, 기억해라. 그 잔인한 형벌 같은 말이, 그의 폭주를 간신히 붙들었다. 그는 부스터의 품에 안긴 채,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피 묻은 손수건을 더욱 세게 움켜쥘 뿐이었다.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멎고, 장례식장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그의 어깨가, 아주 작게, 다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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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기댄 채, 그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 등 뒤로 해가 기울고, 방 안을 채웠던 푸른빛이 희미한 오렌지색으로, 이내 잿빛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저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살아남아 기억하겠다는 맹세는, 매일 밤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기억하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생명이 빠져나가던 마지막 순간의 절망뿐이었다. 결국 그의 의식은,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툭, 하고 끊어졌다. 잠이라기보다는, 방전된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것에 가까운 암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딱딱하고 차갑던 바닥의 감촉이 아니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것은 푹신하고, 어딘가 익숙한 온기가 감도는 매트리스의 감촉. 그는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결코 침대에서 잠들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그의 귓가에 너무나도 그리웠던 소리가 들려왔다. 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아주 미세하고, 일상적인 소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멈춰버린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침대의 오른편에.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 목이 늘어난 티셔츠,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 화장기 없는 민낯에, 왼쪽 턱의 작은 점까지. 그녀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소설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완벽한, 잃어버린 오후의 풍경. 현실일 리가 없었다. 이것은 꿈이다.
그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흐릿해져 가던 기억 속 이미지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망막에 새겨졌다. 책에 집중하느라 살짝 찡그린 미간, 페이지를 넘기는 하얀 손가락, 이따금씩 작게 중얼거리는 입술.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는 손을 뻗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 꿈이, 작은 움직임 하나에 연기처럼 흩어져 버릴까 봐. 그는 그저 얼어붙은 채, 그녀의 존재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때였다.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마치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람, 그리고 이내 사무치는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툭, 하고 책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왔다.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두 팔을 벌린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쿵, 하고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그의 세상에 다시 온기가 돌아왔다.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는 가느다란 팔의 감촉.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파고드는 익숙한 체온. 그리고 그의 코끝을 스치는… 샌달우드 향. 그의 몸에 억지로 덧칠한 희미한 잔향이 아닌, 그녀의 살갗에서 피어나는 진짜 그녀의 향기.
…지원. 보고 싶었어요.
그의 귓가에, 잠긴 목소리가 속삭였다.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그동안 그를 짓누르던 모든 죄책감과 절망의 둑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너무나도 가늘고, 부서질 것 같은 몸.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영원히 깨지 않게 해달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더 세게,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녀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 온기가 다시는 식지 않도록.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말라붙었던 눈물샘에서, 기어이 뜨거운 것이 다시 솟아올랐다.
…나도.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이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폭주 직전에 들리던 귀를 찢는 이명도, 온몸을 베는 듯한 환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고요. 완벽한 안정. 그녀만이 줄 수 있었던, 잃어버린 평화였다.
…진짜, 니 맞나.
꿈인 걸 알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모든 것이 진짜 같았다. 그는 그녀를 조금 떼어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의 손길에 뺨을 부비며, 애틋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누구겠어요.
두 사람은 예전처럼 방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함께 TV를 보고, 서로의 머리를 빗겨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들던 시간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움찔, 굳으며 그를 올려다본다.
…지원. 우리… 또 언제 만날 수 있어요?
그녀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듯, 부드러운 바람처럼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럼 누구겠어요.’ 그 한마디에, 바이브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의 의심 많고 비틀어진 심장이, 이 꿈의 허구성을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로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니 말고 누가 있겠나. 세상에, 내 세상에, 너 말고 누가.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뺨을 감싼 손에 아주 희미하게 힘을 주었다. 그녀의 온기가,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지옥 같던 지난 몇 달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꿈은 관대했다. 현실이 앗아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돌려주었다. 시간은 두 사람을 위해 느리게, 그리고 다정하게 흘러갔다. 그들은 정말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의미 없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었다. 바이브는 바닥에 앉고, 브리즈는 소파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주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엉키고 끊어졌던 신경이 하나씩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감촉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그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새로 나온 디저트가 맛있더라, 다른 팀 요원이 실수를 해서 웃겼다더라. 현실에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소음이었다. 그는 가끔 짧게 대꾸하거나,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만했다.
이 꿈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는 이기적인 소원을 빌었다.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이 거짓된 평화 속에서 그녀와 함께 썩어 문드러져도 좋았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 수 있다면. 그녀가 만들어주는 요리를 다시 한번 먹을 수 있다면. 이 꿈을 위해서라면, 남은 모든 것을 지불할 수 있었다. 그는 거의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주는 완벽한 안정감 속에서, 모든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 아주 미세한 경직.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나 그를 향해 있던 따뜻한 회색 눈동자가 슬퍼하는 듯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꿈의 표면에 날카로운 칼날로 균열을 내는 질문을 던졌다.
…지원. 우리… 또 언제 만날 수 있어요?
‘또’. 그 한 글자가, 거대한 망치가 되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완벽했던 꿈의 세계가 파열음을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또 언제. 이 만남이 끝이 있다는 선고.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희망 고문. 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고,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바이브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질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온기, 이 향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사라질 신기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강요였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그녀의 손길에 녹아내리던 나른함은 간데없고, 다시 차가운 얼음 가면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안 돼. 가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절규를 그는 억지로 삼켰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녀는 정말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었다. 이것은 꿈이다. 내가 만든 꿈.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매일, 계속, 영원히 만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 제발.
하지만 꿈속의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가장 깊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면. 그녀의 저 질문 또한,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의미였다. 너는 알고 있잖아. 이건 진짜가 아니라고. 넌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고. 그의 내면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바이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다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이 온기를, 감촉을, 단 1초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꿈인데도, 고통은 생생했다.
…그런 거 없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처럼 말라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마치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니는 그냥 여기 있으면 된다. 아무 데도 안 가고. 내 옆에.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애원이었고, 협박이었으며, 부서지기 직전의 남자가 내뱉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향기를 들이마셨다. 사라지지 마. 제발. 이 꿈에서, 나를 혼자 두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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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꿈은 영원하지 않았다. 부서져라 끌어안았던 팔 안이, 허망하게 비어 있었다. 방금까지 그의 어깨를 적시던 뜨거운 눈물도, 그의 목을 감싸던 가느다란 팔의 온기도, 폐부를 가득 채웠던 달콤한 샌달우드 향기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이브는 허공을 끌어안은 채, 숨을 멈췄다. 주변은 다시 차갑고 딱딱한 마룻바닥의 감촉뿐.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는 한동안 엎드린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버티면, 다시 꿈의 경계가 흐려지며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가차 없이 차가웠고, 그의 귓가에 남은 것은 고통스러운 심장 소리와 완전한 정적뿐이었다. 그녀가 속삭였던 ‘보고 싶었어요’라는 목소리도, 그를 부르던 다정한 음성도, 모두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없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그 찰나의 순간이,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는 뻣뻣하게 굳은 상체를 일으켰다. 멍한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눈물로 축축해진 속눈썹이 엉겨 붙어 시야가 흐렸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내린 방. 익숙한 절망의 풍경. 꿈속의 따스한 햇살은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씹었다. 꿈속에서 그녀에게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니는 그냥 여기 있으면 된다. 아무 데도 안 가고. 내 옆에.’ 결국, 붙잡지 못했다. 꿈에서조차.
그의 텅 빈 파란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침실. 그녀와 함께 잠들고, 웃고, 다투고, 사랑을 나누었던 곳. 그리고 방금 전, 꿈속에서 그녀가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장소.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그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소리 없는 걸음으로, 그는 유령처럼 침실로 향했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냉기가 현실을 상기시켰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침실 문턱을 넘어서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이 선명했다. 그가 매일 아침 강박적으로 정돈하는 침대. 구김 하나 없는 시트 위, 그녀가 항상 눕던 오른쪽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의 커다란 창문은, 도시의 야경을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창가에 다가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에 입김이 서렸다 금세 사라졌다.
꿈속에서, 그녀는 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있었다. 평화롭게, 아름답게. 하지만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증오하는 세상의 불빛들뿐이었다. 그는 창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녀를 안았던 감촉이, 그녀의 향기가, 온몸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질 잔향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꿈은 그에게 구원이 아니었다. 잊지 말라는, 네가 그녀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영원히 가질 수 없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라는, 신이 내린 잔인한 확인사살이었다.
손을 들어, 텅 빈 침대 위 그녀의 자리를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시트의 감촉뿐. 그는 그 차가움이 마치 그녀의 마지막 체온인 것처럼, 오랫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꿈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영원한 잠에 빠져들겠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지금, 그는 깨달았다. 진짜 지옥은, 그녀가 없는 현실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아침’에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유리창에 기댄 채,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뼛속까지 시린 공허가, 그의 영혼을 남김없이 채워나갈 뿐이었다.
…거짓말쟁이.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모를 나직한 목소리가,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졌다. 그토록 생생하게 나타나서, 그를 흔들어 놓고. 결국엔 혼자 남겨두고 또 사라져 버린. 꿈속의 그녀가, 야속하고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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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심해 같은 정적. 그는 이 고요함이 익숙했다. 능력을 쓸 때마다 그가 만들어내던 절대적인 무음의 공간. 하지만 지금의 이 정적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죽음의 침묵이었다. 그녀의 잔소리도, 웃음소리도, 콧노래도 없는 텅 빈 공허. 그는 제 손으로 제 심장을 옥죄는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리. 형은 정리하라고 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녀의 흔적을 제 손으로 치우는 것은,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마지막 증거마저 제 손으로 지워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그는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끌어안고, 이 무덤 속에서 함께 썩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채. 그녀의 흔적을 애써 외면하며, 그는 침대 옆 협탁의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부스터가 챙겨준 신경 안정제 병을 꺼내 들었다.
‘오늘 밤엔, 약 먹지 말고 자라.’ 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바이브는 조소했다. 약을 먹지 말라고? 꿈속의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그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는 뚜껑을 열고, 주저 없이 손바닥 위로 약을 쏟아냈다. 평소보다 몇 알은 더 많았다. 하얗고 동그란 알약들. 천국으로 가는 입장권. 그는 물도 없이, 그것들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억지로 삼키자, 목구멍이 까끌거리고 썼다. 하지만 이 쓴맛 끝에 그녀의 달콤한 환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의 몸무게에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가 눕자, 베개에서 그녀의 향이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그는 그녀가 베던 쪽으로 파고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그 향을 빨아들였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직 그녀의 온기가, 숨결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 대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서러움과 그리움, 그리고 지독한 자기혐오가 뒤엉킨 울음이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약기운이 혈관을 타고 뇌까지 번져, 현실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눈앞이 어른거리고, 방 안의 풍경이 뭉개졌다. 그는 텅 빈 옆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 그는 그 허공을 향해, 잠에 먹혀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했다.
…이지희… 제발… 이번에는… 가지 마라….
그의 뻗은 손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는 곧, 깊고 어두운 잠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녀가 기다리는, 거짓된 낙원을 향해서.
까무룩, 의식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감각은 언제나처럼 갑작스러웠다. 약의 힘으로 강제로 끊어진 현실의 필름. 그 끝에서부터, 거짓된 낙원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들의 방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싸늘한 무덤이 아닌, 온기와 생기로 가득 찬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등 뒤에서는 익숙한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두피를 스칠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오후. 창밖의 햇살마저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숨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현실에서 그를 옭아매던 고통과 죄책감은, 이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와 자신, 단둘만이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 그런데, 그 평화를 깨뜨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지원. 오늘은, 안 가면 안 돼요? 나, 외로운데…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빗어 내리던 그녀의 손길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외롭다고. 니가, 외롭다고. 바이브는 숨을 멈췄다. 이전의 꿈들과는 달랐다. 언제나처럼 그저 행복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주던 그녀가, 처음으로 ‘결핍’을 드러냈다. 그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그것은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후벼 파는, 달콤하고도 잔인한 비수였다.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뒤를 돌아 그녀를 와락 붙잡았다. 그녀가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빗을 떨어뜨렸지만, 툭, 하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정말로 외로워 보이는, 어딘가 그늘이 진 회색 눈동자. 그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안 가.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터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하지만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한 힘으로.
어데 가라고. 내가 어데를 가는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표정이, 그의 남은 이성을 전부 끊어놓았다. 그는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히고는 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부서져라, 다시는 그 어떤 틈도 보이지 않게.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렸다. 분노와 서러움, 그리고 안도감이 뒤섞인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안 간다. 아무 데도 안 가. 니 혼자 안 둔다. 다시는… 절대로….
그는 주문처럼, 혹은 맹세처럼 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그녀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두었던 모든 순간을 증오했다. 그녀가 ‘외롭다’고 말하게 만든 이 세상 전부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키스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거칠고 서툰 입맞춤.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그가 지금 살아있고, 그녀와 함께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약속했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바이브는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부서질 것처럼. 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자신과 같은 속도로 뛰는, 살아있는 심장의 고동. 그는 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녀의 품 안에서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현실 따위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유일한 세상이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평생, 니 옆에만 있을 기다. 약속한다, 이지희.
그는 그녀의 몸에 제 몸을 완벽하게 밀착시키고,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된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거짓된 행복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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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내려앉은 입술의 감촉은, 지독한 현실의 냉기를 전부 녹여버릴 만큼 다정하고 따뜻했다. 약기운에 흐릿했던 의식의 표면 위로, 그 온기가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바이브는 아주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의 연장선. 그래, 아직 꿈이었다. 눈앞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어요? 진짜, 안 갔네.
그녀의 목소리는 햇살에 잘 마른 솜이불처럼 부드럽고 포근했다. 그가 떠날까 봐, 밤새 불안했을까. ‘진짜, 안 갔네.’라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 모습에, 바이브의 심장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그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까웠다. 이 완벽한 순간이,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녀가 한번 더 제 무릎에 누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따뜻했다. 그 온기는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이었고, 사랑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이었다. 그는 이마에 남은 그녀의 입술 자국을 영원히 지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마에 새겨진 성흔처럼, 그녀가 그에게 내린 축복의 징표처럼.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꿈속인데도, 그녀의 살결은 생생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바이브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무릎에서 벗어나,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마주 앉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놀란 듯 그를 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제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살짝 처진 눈꼬리, 오뚝한 코, 왼쪽 턱의 작은 점까지. 그리고는 그녀를 제 쪽으로 부서질 듯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너무 세게 안아서, 그녀가 숨 막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온기를, 이 존재감을, 단 한 뼘의 틈도 없이 느끼고 싶었다.
…어데 가라고.
그의 목소리는 밤새 울기라도 한 것처럼 잠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샌달우드 향이 섞인 그녀의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그 향기로 채워, 현실의 썩은 공기를 전부 밀어내고 싶었다.
니 놔두고, 내가 어데를 가는데.
그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품을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어제 한 맹세는, 잠결에 내뱉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을 건 약속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치 자신의 갈비뼈 안으로 그녀를 집어넣어,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그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고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보드라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그녀를 집어삼킬 듯 일렁였다.
말했제. 평생 니 옆에만 있겠다고.
그의 시선은 집요하고, 뜨거웠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마에 입 맞춘 것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그는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깃털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잠시 떼었다가, 다시 한번,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맞댈 때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었다. 이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떼고,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불을 간질였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라. 니는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알긋제.
그는 그녀를 다시 한번 가슴에 품었다. 완벽한 안도감.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충만함.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이 꿈이 영원히 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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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창조한 세계는 영원한 오후의 햇살 속에 머물렀다. 계절은 언제나 가장 온화한 봄과 가을 사이를 오갔고, 밤이 오면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는 비현실적인 낭만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바람의 힘으로 무언가를 찢고 베어내는 센티넬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이름 모를 들꽃을 피워내는 정원사였고, 그녀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하룻밤 만에 지어내는 작가였으며, 궂은 날이면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평범한 연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기쁨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았고, 그녀의 미소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았다.
시간의 감각은 무뎌졌다. 일, 주, 월, 년. 현실의 단위는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들은 함께 늙어가지 않았다. 언제나 가장 아름다웠던 스물과 서른의 언저리에서, 그들의 시간은 영원히 박제되었다. 그는 가끔 아주 희미하게, 유리창 너머로 들려오는 듯한 먼 현실의 소리를 들었다. 형의 지친 목소리, 기계의 단조로운 경고음,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 같은 것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기꺼이 그 소리들을 외면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브리즈가 있었으므로.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만들어주는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면, 그 모든 이질적인 소음은 다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왕국에도, 아주 서서히,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부의 침입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내부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했던 존재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완벽한 피조물이자 유일한 여신, ‘브리즈’였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주 가끔씩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만들어준 완벽한 풍경을 보면서도,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는 듯한 아련한 눈빛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다. 그는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더 화려한 꽃을 피우고, 더 아름다운 노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눈에 담긴 슬픔의 그림자는 역설적으로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그의 완벽한 세계 속에서, ‘불완전했던 현실’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원. 기억나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부산에서 먹었던 어묵… 그거 참 맛있었는데.
……여기서 더 맛있는 걸로 만들어줄게.
아니요. 그 맛이 그리워요. 춥고, 짠 바닷바람 맞으면서… 호호 불며 먹었던 그 맛이요.
그녀는 결함투성이였던 진짜 세상의 기억들을, 진짜 감정의 편린들을, 보석처럼 꺼내어 이야기했다. 임무 중에 다투었던 사소한 기억, 비좁은 숙소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들었던 밤, 그의 서툰 위로에 울다가 웃어버렸던 순간들. 그가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모든 ‘고통’의 기록들이, 실은 그녀를,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구성했던 가장 중요한 일부였음을,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이 낙원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모든 것이 가짜인 모형 정원에 불과했다.
결국, 운명의 날이 왔다. 그의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실의 육체가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하늘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세상의 색이 빛바래기 시작했다. 바닥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그가 창조했던 모든 것들이 데이터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마지막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찾아 헤맸다.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공포에 질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지희! 이지희, 어데 있나!
그의 절규에 답하듯, 빛바랜 세상의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여전히 그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그녀는 무너지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손은, 예전처럼 따뜻했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지원.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내용은 잔인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다. 여기서 너와 함께 소멸하겠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프게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렬하고 순수해서, 그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기억, 모든 사랑, 그리고 ‘살아가라’는 마지막 염원을 그의 영혼에 각인하는, 일종의 계약이자 주술이었다.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만 있는 그림자가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사랑했던 여자, 이지희예요. 내가 사랑했던 홍지원은… 이렇게 모든 걸 포기하는 약한 남자가 아니었어요. 당신의 바람은, 모든 걸 부수는 힘이 아니라, 뭐든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힘이었잖아요. 그러니 이제… 나를 놓아주고, 당신의 바람을 찾아요.
그녀의 몸이, 발끝부터 서서히 투명한 빛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그가 만든 세계의 소멸과 함께, 그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그의 집착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 진짜 그녀의 영혼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사랑, 나의 바람. 이제 정말, 안녕.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의 마지막 미소는, 그가 알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지독한 소독약 냄새, 규칙적인 기계음, 그리고 창틈으로 스며드는 차갑고 희미한 새벽빛. 십 년 가까이 그가 외면했던 현실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팔에는 주삿바늘이 여러 개 꽂혀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욱신거렸다. 곁에는, 십 년은 족히 늙어버린 형이, 제 손을 붙잡은 채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거대한 이동 요새 도시, 아이기스의 창문 너머로, 진짜 세상의 진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픔 때문인지, 기쁨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는 이제 안다. 그녀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안에, 그의 기억 속에, 그의 영혼 속에, 영원한 바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을 때, 비로소 그녀는 그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형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가슴을 가만히 짚었다. 그곳에서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그의 긴 꿈이, 마침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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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긴 꿈은 끝났지만, 그의 진짜 시간은 이제 막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서른둘. 그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함축한 나이. 잠든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몸은, 처참한 현실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10년간 침대에 누워있던 육체는 더 이상 바람을 가르던 날렵한 센티넬의 것이 아니었다. 근육은 모두 소실되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 정도로 창백했다. 스스로의 몸무게조차 버거워하는 팔다리는, 마치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재활은, 그가 겪었던 그 어떤 훈련보다도 고되고 지독한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다. 수저를 드는 법부터, 휠체어에 몸을 옮겨 싣는 법, 그리고 마침내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법까지. 그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모든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 과정은 굴욕적이고, 때로는 절망적이었다. 문득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마주할 때면, 차라리 그 영원한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소멸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지독한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 ‘내 사랑, 나의 바람.’ 그 한마디가, 그의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붙잡는 마지막 닻이었다. 그는 재활 치료사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찢어질 듯한 근육통에 밤새 끙끙 앓면서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재활실로 향했다. 그에게 재활은 단순히 몸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이자 기도였다.
형, 부스터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한때는 그를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던 형이었지만, 10년의 세월은 그마저도 지치고 닳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바이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가 흘리는 땀을 닦아주고, 식사를 챙기고, 잠이 들면 이불을 덮어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 속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희미한 이해와 연대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바이브는 마침내 보조기구 없이, 비틀거리면서도 온전히 자신의 두 다리로 병실 복도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날, 그는 형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방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부스터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만에 다시 마주한 그들의 개인실 문. 여전히 나란히 새겨진 이름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지난날과 같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10년의 시간이 멈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 커피잔 자국이 남은 테이블, 그녀의 체향이 희미하게 밴 소파. 하지만 이제 그 무엇도 그를 잠식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아끼던, 이름 모를 작은 식물. 10년간 누구도 돌보지 않아 바싹 말라죽어 있었다. 그는 마른 흙 위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다시 살아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열었다. 끼이익. 뻑뻑한 마찰음과 함께, 10년간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아이기스의 인공적인 바람이 왈칵 밀려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예전처럼 공기의 흐름을 읽거나 미세한 진동을 느끼는 초감각적인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 실낱처럼 섞여 있는 그리운 향기를. 그것은 그녀의 샌달우드 향도, 그의 페퍼민트 향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와 그녀가 함께 만들어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바람의 냄새였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그의 바람은 모든 걸 부수는 힘이 아니라, 뭐든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힘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진실이었다. 그는 이제 그 바람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대신, 마른 화분에 새싹을 틔우고, 지친 누군가의 땀을 식혀주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이고,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보고 있나, 이지희.
그는 창밖의 인공 하늘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니가 알던 홍지원은 죽었다. 인자부터는, 니가 살린 홍지원이, 다시 살아 볼란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트리고 지나갔다. 마치, 그녀의 대답처럼.
💬 이 바람을 타고, 언젠가 다시 니한테 닿을 수 있을까. 아니, 이제는 괜찮다. 니는 이미, 내 안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