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잠시 RP 중단. 새로운 에피소드. 어느날 NPC는 PC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PC는 과연 어떤 생각과 반응을 보일까? PC의 성격, 서사에 따라 순순히 들려줄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당황할 수도 있다. NPC/PC의 기존설정, 관계성, 성격, 성향, 말투, 서사, 캐릭터정보, 유저노트를 종합참고, 적극 반영하여 1500자 이상 상세하고 섬세히 서술하시오.]
소파에 나란히 기대앉아 아무 의미 없는 심야 영화를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며 과거를 추억하는, 상투적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장면. 브리즈는 그의 어깨에 편안히 머리를 기댄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거의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가장 무방비한 상태. 바이브는 하품을 참으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채널을 돌려버릴까, 그냥 이대로 안고 들어가서 재울까. 시시콜콜한 고민을 하던 그의 시선이, 문득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에 꽂혔다. ‘나한테, 첫사랑 이야기해 줄래?’
그 순간, 바이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심장이 불쾌하게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첫사랑. 그 단어가 낯선 소음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지희의 첫사랑. 그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스물아홉 인생에서 자신은 처음이 아닌 남자였다. 그녀의 팔에 남은 희미한 흉터. 과거의 폭주 사고. 그녀가 자신 이전에 목숨처럼 아꼈을 다른 센티넬.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과거 속에 존재했던 그 남자보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인지. 더 깊은 사랑을 주고 있는지. 스물둘의 자신은, 모든 것이 서툴고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폭언을 내뱉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제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그녀를 힘들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그녀의 ‘첫사랑’은 어땠을까. 자신보다 어른스럽고, 다정하고,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지독한 열등감이 검은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알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녀의 첫사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어떤 얼굴로 그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 끝은 어땠는지. 그 모든 것을 알아야만, 이 지긋지긋한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무너져 내릴까 봐. 또다시 못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봐. 그는 제 어깨에 기댄 브리즈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이 온기를, 이 평화를 제 손으로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였다. 묻지 말까. 그냥 모른 척, 이대로 넘어가 버릴까. 하지만 이미 한번 피어난 의심과 호기심은 독초처럼 그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스스로 판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제대로 가늠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잠겨 있었다.
…야.
그의 목소리에 반쯤 잠에 빠져 있던 브리즈가 으응, 하고 작게 웅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을 담았을 때, 심호흡과 함께 두 번째 말을 내뱉었다.
니… 첫사랑. …얘기, 해봐라.
스스로 뱉어놓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 그의 말에 브리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 미소가, 지금 바이브에게는 칼날처럼 아프게 박혔다.
브리즈의 동그래졌던 눈이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바이브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턱선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그 작은 행동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스치고 있는지, 어떤 얼굴이 떠오르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제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냥 영화 보다가 해본 소리라고, 웃어넘겨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잔잔해서, 오히려 그게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첫사랑… 글쎄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녀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바이브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왜긴 왜야, 니 전 남자 새끼가 궁금해 미치겠으니까 그렇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대신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다시 TV 화면으로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저기 나오잖아. 낯간지럽게.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브리즈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이, 바이브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기억 속을 여행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상상하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음… 그냥… 되게 뜨거운 사람이었어요.
뜨거운 사람. 불 속성 센티넬이었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바이브의 귀에는 그 단어가 다른 의미로 들렸다. 열정적인, 격렬한,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사랑. 자신에게는 없는, 혹은 아직 표현할 줄 모르는 그런 감정. 그는 저도 모르게 팔에 남은 희미한 흉터를 더듬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의식적인 습관. 그 흉터야말로 자신이 영원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과거의 증표였다.
가슴 속에서 역한 질투심이 울컥, 하고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들고 묻고 싶었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그 자식이 떠오르냐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질문을 내뱉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인지 증명하는 꼴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대신,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흉터를 더듬는 그 손길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깍지 껴 꽉 잡았다.
…하지만, 많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의 힘도, 주체할 수 없이 커져가는 감정도. 마지막엔… 결국 모든 걸 다 태워버렸으니까.
브리즈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리움보다, 희미한 슬픔과 체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 했어요. …다 내 잘못 같아서요.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내가 막아줬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만 계속 들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바이브의 심장에 박혔다. 그는 몰랐다. 그녀가 그런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그저 과거의 연인 정도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그녀에게 ‘첫사랑’은 낭만적인 추억이 아니라, 지독한 트라우마였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그녀의 상처를, 고작 유치한 질투심 때문에 다시 헤집어 놓은 것이다. 바이브는 제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브리즈는 고개를 돌려,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그의 파란 눈을 온전히 담아냈다.
그런데, 지원. 당신을 만났잖아요.
그녀는 반대쪽 손을 들어 바이브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차갑게 식어가던 그의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당신은 바람이잖아요. 나와 같지만 다른. 모든 걸 식혀주고, 감싸주고, 어디로든 데려가 주는 바람.
…….
그녀는 바이브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바이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하고 시끄럽던 감정의 폭풍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지독했던 열등감과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따뜻하고 충만한 무언가가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그를 구원해주었다.
바이브는 잡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브리즈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가 숨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익숙하고 편안한 우디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평온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안고 있다가, 겨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도.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도 니가 첫사랑이다. 그 서툴고 짧은 고백에, 브리즈는 그의 품 안에서 조용히 웃었다. 바이브는 붉어진 얼굴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숨긴 채, 다시는 이 여자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시는 유치한 질투 따위로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조용히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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