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야의 모든 것이 찢어지고 있었다. 이건 비유가 아니었다. 시베리아 동토 깊숙한 곳에 숨겨진 불법 연구 시설. 그 중심부에서 터져 나온 S급 변이 괴수의 파장은 공간 자체를 뒤틀고 있었다. 내 임무는 간단했다. 놈의 파장 핵을 정확히 절단하고, 시설의 자폭 시퀀스가 완료되기 전에 탈출하는 것. ‘단독 임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사실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설 내부는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뒤틀린 공기의 흐름과 구조물이 무너지는 굉음, 괴수의 끔찍한 비명까지. 내 감각은 포화 상태를 넘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바람이 되었다. 모든 소음과 저항을 지우고, 오직 목표를 향해 날아드는 한 줄기 칼날. 내 ‘바이브 센서’가 놈의 핵이 위치한 좌표를 정확히 포착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대기의 압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보이지 않는 진공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사일런트 캘러미티’.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일격이 작렬했다. 공간이, 소리가, 빛조차도 조용히 갈라지며 놈의 존재 자체가 소멸했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불안정해진 파장이, 뒤틀린 공간의 잔재와 공명하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가는 감각. 눈앞이 하얘지고, 귀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이명이 울렸다. 통제 불능. 폭주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손으로 연구 시설의 벽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진공의 칼날이 주변의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고 있었다. 멈춰야 한다. 멈춰야 하는데,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다. 매 순간 수억 개의 칼날이 온몸을 난도질하는 고통 속에서, 내 의식은 까맣게 잠식되어 갔다. 그때였다. 이 지옥 같은 소음 속에서, 유일하게 익숙하고 안정적인 파장이 느껴졌다. 브리즈. 그녀가 내 폭풍의 핵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지 마라. 오지 마, 씨발. 내 속의 남은 이성이 절규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호복도 없이, 오직 가이드 제복 하나만을 걸친 채였다.
지원, 저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일으킨 진공의 폭풍에 닿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내 능력의 여파에 긁히고 베이는 것이 보였다. 젠장, 젠장!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폭주하는 힘은 그녀를 향해 더욱 거세게 휘몰아칠 뿐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내게 쏟아붓는, 목숨을 건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따뜻한 바람이, 내 몸을 찢어발기던 광란의 칼날들을 하나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통이, 공포가,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거대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내 의식은 천천히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피를 토하며 내 품에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눈을 떴을 때, 코를 찌르는 것은 익숙한 소독약 냄새였다. 아크 의료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폭주의 후유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안정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그때, 문이 열리고 주치의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내게, 내 세상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했다.
브리즈 가이드가, 자신의 수명을 연료로 모든 능력을 끌어다 썼네. 자네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남은 시간은… 길어야 1년일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명. 1년. 그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망치처럼 두들겼다. 내 폭주를 막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내게 쏟아부었다. 한 달마다 감각을 하나씩 잃고, 운동 능력도 사라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온몸이 바스러지듯… 죽는다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 발끝부터 서서히 부서져 가루가 되는 기분이었다. 왜. 왜 그랬는데. 차라리 나를 버리고. 내가 폭주해서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니가…! 울음 대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부, 나 때문에 부서지고 망가졌다. 엄마도, 그리고 이제는 이지희까지.
그녀는 몇 시간 전에 이미 깨어나 모든 사실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치의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녀가 있는 1인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매 걸음이 지옥이었다. 문 앞에서, 나는 차마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그 어떤 말도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는 위선에 불과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단정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내가 들어온 것을 보고,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일어났네요, 지원.
그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뻔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침대 옆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직은.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들었어.
한참 만에, 내가 쥐어짜듯 내뱉은 말이었다.
나도요.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마치 내일 날씨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슬픔도, 원망도 없이 그저 나를 담고 있었다. 그 평온함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왜 그랬는데.
내 목소리가 격렬하게 떨렸다. 원망과 자책이 뒤섞인,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였다.
왜 그랬냐고, 이지희! 차라리 날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니가 왜… 니가 뭔데!
나는 소리쳤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싶었다. 멱살이라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손등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나는 어린애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이니까. 지원, 당신이니까 그랬어요. 당신 없는 세상은, 나한테 의미 없으니까. 그게 100년이라도, 나한텐 지옥일 뿐이니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1년과, 나의 남은 평생을 맞바꾼 것이다. 이기적인, 지독한,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여자. 나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1년. 한 달에 하나씩, 그녀가 세상을 잃어가는 것을 나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이자, 동시에 나에게 내려진 영원한 형벌이었다.
---
우리의 1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크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모든 임무에서 제외했다. 1년간의 유예.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식사와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우리의 숙소는, 고요해서 오히려 잔인한 감옥이었다. 이지희는 나 때문에 망가져 갈 것이고, 나는 그녀가 부서지는 모든 순간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의 1년은 죽어가는 시간이었고, 나의 1년은 그녀를 죽여가는 시간이었다.
1개월 차 - [미각(味覺)] 소실
그날은 유난히 날이 좋았다. 창밖의 인공 태양은 눈이 부셨고, 나는 그녀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매콤하게 끓인 순두부찌개. 소화기관이 망가지기 전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라도 더 먹여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조급함 때문이었다.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얼큰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내 등 뒤에서 가만히 나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기댔다.
맛있는 냄새가 나요, 지원.
나는 대답 대신, 국물 맛을 본 숟가락을 식혀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 해봐라.’ 그녀는 어린애처럼 순순히 입을 벌렸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늘 이맘때쯤이면 ‘음, 딱 좋다’라며 눈을 접어 웃던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그저 몇 번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아무 맛이 안 나요.
그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내 입으로 국물을 가져갔다. 완벽했다. 매콤하고, 칼칼하고, 감칠맛이 도는, 내가 아는 그 맛. 하지만 그녀의 눈은 ‘왜 아무 맛도 안 나지?’라는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첫 번째 약탈이 시작된 것이다. 신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가 가진 소박한 기쁨부터 앗아갔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내 얼굴을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빌어먹을 미소가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원래 아침엔 입맛이 없는 법이니까. 대신 지원이 먹는 모습 보면서 먹을래요. 당신이 맛있게 먹어주면, 나도 배부른 기분일 것 같아.
그날 이후, 우리의 식사 시간은 고문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앞에 앉혀두고, 억지로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조잘거렸다. “그거 맛있어요? 표정보니까 엄청 맛있나 보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모든 맛이, 그녀가 잃어버린 감각이라는 사실이 죄책감처럼 혀를 찔렀다. 밤이 되면, 나는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냈다. 그녀가 맛볼 수 없는 세상을, 나 혼자 누릴 자격은 없었다.
2개월 차 - [왼쪽 다리] 마비
그녀의 미각이 사라진 지 한 달. 우리는 그 부재에 익숙해지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식사를 책임지는 대신, 그녀는 내 생활의 모든 것을 챙겼다. 널브러진 내 옷을 개고, 씻기 귀찮아하는 나를 욕실로 밀어 넣는, 평범해서 눈물 나는 일상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내가 벗어둔 제복을 챙겨 들고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받쳤다.
고마워요. 큰일 날 뻔했네. 갑자기 다리에 힘이…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왼쪽 다리는 마치 마네킹의 다리처럼, 그녀의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다리를 움직이려 애썼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약탈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공포. 지난 한 달간 애써 숨겨왔던 그 감정이 그녀의 회색 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왼쪽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각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뻣뻣한 살덩어리.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미친 듯이 그녀의 다리만 주물렀다.
…지원.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만해요. 괜찮아.
…안 괜찮잖아.
내 목소리가 짓이겨져 나왔다. 안 괜찮았다. 조금도. 그녀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괜찮아요. 이제 지원한테 더 업혀 다닐 핑계가 생겼네. 나 무거워도, 버리면 안 돼요?
그 농담에, 나는 끝내 무너져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게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다리가 되어 집 안을 돌아다녔고, 그녀를 업거나 안은 채 하루를 보냈다. 밤이 되면,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왼쪽 다리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 그것은 그녀의 죽음의 일부이자, 나의 죄의 증거였다.
3개월 차 - [목소리] 소실
그녀가 걷지 못하게 된 이후, 우리의 세상은 침대 위로 축소되었다. 나는 온종일 그녀의 곁에 머물렀고, 그녀는 그런 내게 책을 읽어주거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나를 안정시키던 그녀의 가이딩 파장이 담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바람.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평소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잘 잤어요, 지원?’ 하고 속삭여줄 그녀의 목소리를.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보며 웃고만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그녀를 불렀다. ‘야, 이지희.’ 그녀는 내 부름에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것은 희미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세 번째 약탈. 신은 내게서 마지막 구원마저 빼앗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괜찮다고, 아무 말 안 해도 다 안다고, 미친놈처럼 속삭였다. 그때, 그녀가 나를 밀치고는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메모장에 무언가를 급하게 적어 내게 보여주었다.
[지원. 내 말, 들려요?]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절박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메모장 위로 다시 펜을 놀렸다.
[무서워. 지원. 나 너무 무서워.]
그녀의 솔직한 공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펜을 빼앗아, 그 옆에 답을 적었다.
[내가 있잖아. 니 세상이 전부 사라져도, 내가 니 세상이 되어줄게.]
그날 이후, 우리는 필담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노래를 불러주거나 책을 읽어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온종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눈에 내 모든 것을 새겨 넣으려는 사람처럼. 나는 잠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 여린 목덜미에. 그녀의 침묵은 나에게 내려진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4개월 차 - [오른쪽 팔] 마비
그녀가 목소리를 잃은 세상은 고요했다. 우리의 대화는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녀의 필체는 처음엔 절망으로 떨렸지만,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제 왼팔과 오른손만으로 우리 사이의 모든 소통을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농담을 건넸고, 가끔은 핀잔을 주기도 했다. [지원, 또 수건 아무 데나 던져놨죠.] 나는 그 메모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그녀가 내게 남기는 마지막 흔적들이었다.
네 번째 비극은 아침 식사 시간에 찾아왔다. 나는 그녀가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스프를 끓여 식힌 뒤 숟가락으로 직접 떠먹여 주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얌전히 받아먹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오른손으로 물컵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마치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다시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팔은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우리를 이어주던 유일한 소통 수단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방법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은 왼손으로, 떨리는 필체로 메모를 남겼다.
[아직 왼손이 남았어요.]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웃어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굳어버린 오른팔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펜을 쥘 수 있도록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마치 내 의지를 불어넣으면, 그녀의 팔이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내가 니 손이 되어주면 된다.
나는 그녀의 남은 왼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세상을 더듬을 왼손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더욱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녀가 온전히 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그녀의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도록. 밤이 되면, 나는 그녀의 멈춰버린 양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그녀 대신 내가 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게 해달라고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5개월 차 - [후각(嗅覺)] 소실
그녀의 세상은 점점 더 좁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맛을 잃고, 소리를 잃고, 걷고 쓰는 능력마저 빼앗긴 그녀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즐거움은 ‘향기’였다. 그녀는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풍기는 페퍼민트 향을 좋아했고, 내가 끓여주는 커피 향, 그리고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비 냄새를 좋아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매일 다른 향의 향초를 피우고, 신선한 꽃을 꺾어다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었다.
그날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샌달우드 향초를 피운 날이었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늘 나던 그녀의 샴푸 향과 체향이 섞여,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평온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냄새 좋나. 니가 좋아하는 거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다급하게 옆에 있던 프리지어 꽃병을 그녀의 코앞으로 가져갔다. 강렬하고 달콤한 향기. 그녀는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다섯 번째 약탈. 신은 그녀에게서 추억을 떠올리게 하던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끊어버렸다.
나는 꽃병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와장창,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녀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절규했다.
내 냄새도… 이제 못 맡나. 내 향기도 이제 니한테는 없는 기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왼손을 들어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그녀의 세상에서 냄새가 사라진 이후, 내 세상에서도 모든 향기는 의미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향수를 뿌리지 않았고, 비누도 무향으로 바꿨다. 그녀가 맡을 수 없는 향기를 나 혼자 누리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방은 깨끗했지만, 그 어떤 추억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균실처럼 변해갔다. 그녀는 이제 왼손 하나에 의지해 세상과 소통했다. 맛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녀가 써 내려가는 글씨는 유일한 등대였다. 나는 그 위태로운 불빛이 꺼질까 봐,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6개월 차 - [왼쪽 팔] 마비
그녀의 마지막 손가락이 멈춘 것은, 비가 내리던 오후였다. 그녀는 내 품에 기댄 채,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남은 왼손으로 메모지를 더듬더듬 찾았다. 나는 익숙하게 그녀의 손에 펜을 쥐여주었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을 때, 항상 그랬다. 그녀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원, 비가 와요. 당신…]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펜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여섯 번째 약탈. 그것은 우리를 잇던 마지막 다리의 붕괴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고 팔을 들어 올리려 애썼지만, 마치 내 것이 아니라는 듯 팔은 침대 위로 무겁게 떨어질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쓸 수도, 만질 수도, 나를 붙잡을 수도 없게 되었다. 완전한 고립.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어깨만 들썩이며 우는 그녀의 모습은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쓰다 만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당신…’ 뒤에 이어질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해요? 아니면, 원망해요? 나는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모든 대화는 단절되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모든 것을 추측해야만 했다. 배고파? 졸려? 아파? 나는 온종일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한 번은 긍정, 두 번은 부정.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언어였다. 나는 미친놈처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는 어떻고, 신드롬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쳤고, 리암은 여전히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텅 빈 눈동자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7개월 차 - [소화기관] 소실
우리의 마지막 식사는, 내가 끓인 묽은 야채수프였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사라진 이후에도,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행위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나 자신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았다.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떠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인형처럼 얌전히 그것을 받아삼켰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심하게 경련하더니, 먹었던 모든 것을 그대로 토해냈다. 그녀의 몸이, 이제 인간의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곱 번째 약탈은 그녀의 마지막 인간적인 행위마저 앗아갔다. 나는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며, 내 손이 지독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내게 미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결국 의료팀이 들어와, 그녀의 팔에 차가운 링거 바늘을 꽂았다. 이제 그녀는 투명한 영양액으로만 생명을 연장하게 될 터였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의 일상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차가운 영양액 봉지를 갈아 끼우며, 내가 인간이 아닌 기계를 돌보는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밤이 되면, 나는 텅 빈 주방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입안에서 모래알이 씹혔다. 그녀가 없는 식탁은, 무덤과도 같았다.
8개월 차 - [오른쪽 다리] 마비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살아있는 인형이 되었다. 내가 옮겨주지 않으면 돌아눕지도 못했고, 내가 씻겨주지 않으면 청결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를 안아 들고 옮겼다. 그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지만, 내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는 천근만근 무거워져만 갔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오른쪽 다리가 멈춘 날은,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 위해, 잠시 그녀를 침대에 걸터앉혔다. 그때였다. 그나마 미세하게 움직이며 균형을 잡아주던 그녀의 오른쪽 다리가, 아무런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여덟 번째 약탈은 너무나 조용히 찾아와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이제 완벽한 대칭의 부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한쪽 발판마저 무너져 내린 사람의 눈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양다리를 들어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마치 내가 덮어준 이불의 무게가, 그녀의 몸을 이 세상에 붙잡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날 이후, 그녀는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두 시간마다 한 번씩 그녀의 몸을 뒤집어주었다. 그때마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그녀의 사지는 나에게 ‘너 때문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나는 밤마다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네 개의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지희.
9개월 차 - [청각(聽覺)] 소실
그녀에게 남은 세상은 이제 ‘보는 것’과 ‘느끼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볼 수 있도록, 매일 다른 풍경이 담긴 영상을 스크린에 띄워주었다. 푸른 바다, 붉은 노을, 초록의 숲. 그녀는 텅 빈 눈으로 그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들려주는 음악 소리는 이제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음악을 틀지 않았다. 내가 듣는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녀의 고요한 세상에 대한 기만처럼 느껴졌다. 아홉 번째 약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의료 기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영양액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신호였다. 나는 급하게 새 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경고음은 방 안을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이 창밖의 인공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리에 미세하게라도 반응했을 그녀였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지희.’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손뼉을 치고, 물건을 떨어뜨리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세상은, 이미 완벽한 무음(無音)의 공간이 되어버린 후였다.
이제 내 목소리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 역시 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는, 유리벽을 사이에 둔 사람처럼 영원히 분리되었다. 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내 절규와 고통은 이제 그녀에게 그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는 내 슬픔으로부터도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을 잃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닿지도 않을 목소리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10개월 차 - [촉각(觸覺)] 소실
그녀의 세상에 남은 것은 오직 ‘시각’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남은 감각을 위해, 방 안을 온통 그녀가 좋아하던 연분홍색으로 꾸몄다. 꽃을 가져다 놓고, 그림을 걸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매일 그녀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졌다. 내 체온이라도 그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내 존재가, 아직 그녀의 세상에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열 번째 약탈은, 내 마지막 희망마저 잔인하게 짓밟았다.
그날 나는 평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녀의 손이 너무나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그녀의 피부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음물을 가져와 그녀의 발등에 살짝 떨어뜨려 보았다.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촉각.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가장 원초적인 감각. 그것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가 그녀를 안아도, 그녀는 내가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가 입을 맞춰도, 그녀는 내 입술의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텅 빈 껍데기를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살아있었지만, 그녀의 세상 속에서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절망했다. 내 모든 행동은 의미를 잃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그녀의 몸을 닦고, 영양액을 갈고, 자세를 바꿔주었다. 그녀는 그저 눈만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서,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11개월 차 - [시각(視覺)] 소실
마지막 남은 빛이 꺼진 것은, 모든 것이 끝날 준비를 하던 어느 새벽이었다. 나는 밤새 그녀의 곁을 지키다, 잠시 의자에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처음 만났던 부산 바다 위를 그녀와 함께 날고 있었다. 그녀는 내 등 뒤에 매달려,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지원, 더 빨리!’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 행복한 순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뜬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늘 내 모습을 좇던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은 미동도 없이, 허공의 한 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열한 번째, 마지막 약탈. 그녀의 세상은 이제 완벽한 암흑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숨만 쉬는, 살아있는 관(棺)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이 눈은 더 이상 나를 담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눈꺼풀을 부드럽게 쓸어 감겨주었다. 더 이상 그녀가 텅 빈 어둠을 보고 있지 않도록.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이미 닿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를 속삭였다. 우리의 첫 만남, 첫 키스, 함께 보낸 모든 순간들을.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뺨에 내 뺨을 비볐다. 이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그녀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지막 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12개월 차 - [사망]
시간이 멈춘 방. 열두 번째 달이 시작되고, 나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후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날 아침 공기에 섞인 서늘한 정적은 분명 죽음의 것이었다. 그녀의 심박을 알리는 기계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나는 밤새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이제는 아무런 온기도, 감촉도 전해지지 않는 마네킹의 손. 하지만 내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모든 감각이 떠나버린 얼굴은 인형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고요한 육신 아래에서, 그녀의 영혼이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힘겹게 태우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버텨냈다는 것을. 이 지독하고 이기적인 여자.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려는 잔인한 사람.
기계의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심정지. 모든 수치가 0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지난 11개월 동안 흘릴 눈물은 이미 다 말라버렸다. 나는 그저, 다가오는 이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녀의 몸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발끝에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서, 마치 오랜 먼지를 털어내듯 금빛 가루들이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생명이었다. 그녀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나를 위해 소모했던 모든 힘과 수명이, 이제 그녀의 육신을 지탱하기를 포기하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빛의 입자들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사랑하는 여자가,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녀가,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지는 이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마침내, 그녀의 형체가 완전히 흩어지며 수억 개의 빛가루가 되어 방 안을 유영했다. 마치… 산들바람처럼. 그녀의 코드네임, 브리즈처럼.
빛가루들은 잠시 내 주위를 맴돌더니, 열린 창문을 통해 세상 밖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녀가 떠난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던 환자복만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나는 텅 빈 침대 시트 위로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한 톨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텅 빈 허공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는 그녀에게 영원히 닿지 않을 마지막 인사를.
…잘 가라, 내 세상아.
[후일의 이야기]
그녀가 떠난 후, 나의 시간도 멈췄다. 나는 그녀의 유언 아닌 유언에 따라, 그녀가 내게 선물한 이 지옥 같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냈다. 아크의 살아있는 망령, ‘사일런트 캘러미티’. 그게 나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나는 모든 임무에 자원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생존 확률이 희박한 임무만을 골라서. 모두가 내가 전장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저 죽음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일 뿐이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숨 쉬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고, 폭주 직전의 감각 과부하는 이제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만이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수많은 가이드들이 내게 배정되었지만, 나는 단 한 명의 접촉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파장은 역겨웠고, 그들의 위선적인 동정은 구역질이 났다. 내 세상의 바람은 이지희, 그녀 하나뿐이었다. 나는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았다. 스물둘의 청년은, 어느덧 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인 중년의 남자가 되었다. 얼굴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주름이 패었고, 눈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의 마지막은, 내가 자초한 것이었다. 태평양 심해에서 발견된 미확인 SSS급 괴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 될 거라는 보고서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단독 출전을 자원했다.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심해의 엄청난 수압과 뒤틀린 공간 파장은, 내 능력을 최악의 형태로 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모든 감각과 생명을 끌어모아, 내 생애 마지막 ‘사일런트 캘러미티’를 날렸다. 공간이 찢어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굉음 속에서, 내 몸도 함께 부서져 내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십수 년을 찾아 헤매던 죽음이, 마침내 나를 마중 나온 것이다. 나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희야.’
…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장소에 서 있었다. 사방이 온통 하얀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이 그저 무한한 백색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춥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던 모든 감각 과부하가 사라지고,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안정적인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십수 년의 세월과 고통이 새겨놓은 흉터와 주름은 온데간데없고, 스물두 살의, 가장 젊고 건강했던 시절의 내 손이 있었다. 검은 제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어제 막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 같은, 흠 하나 없는 모습.
멍하니 서 있는데, 저 멀리서 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모습에, 내 심장이 멈췄다. 밝은 갈색 머리, 회색 눈, 그리고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저 얼굴. 내가 십수 년을 매일 밤 꿈속에서 그리고, 또 그리워했던 바로 그 얼굴.
그녀는 마지막 순간의, 바스러져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났던,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스물아홉의 모습 그대로였다. 몸에 딱 맞는 하얀 가이드 제복을 입고, 그녀는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내가 그토록 다시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제 왔네요, 지원.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십수 년을 나를 옥죄던 죄책감도, 고통도, 그리움도, 그 목소리 하나에 눈 녹듯 사라져 내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린애처럼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녀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감쌌다. 따뜻했다. 내가 그토록 다시 느끼고 싶었던, 그녀의 온기였다. 그녀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많이 늦었잖아요.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나는 그녀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내뱉는 진심이었다.
…미안하다. 너무 오래… 혼자 둬서. 미안하다, 지희야.
'꿈을 안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 (0) | 2026.06.06 |
|---|---|
| IF: 밴드 (0) | 2026.05.24 |
| 둘 중 누가 더 아까운가 (0) | 2026.05.23 |
| 여섯 살이 된 PC / NPC (0) | 2026.05.23 |
| 결혼식 (0) | 202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