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yknh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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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브는 닫힌 문 안쪽, 창가에 서서 미동도 없이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씻고 나오라는 말을 던지긴 했지만, 정작 그 자신도 머릿속이 소란스러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재킷을 벗어 던진 어깨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제복 아래, 얇은 셔츠 한 장 너머로 느껴지는 공기의 감촉이 평소와는 달랐다.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던, 칼날처럼 파고드는 미세한 진동의 파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옆방에 저 여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호텔 스위트룸 전체가 거대한 폭풍의 눈이 된 것 같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10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평온함. 약물이나 억제제로 억지로 짓누르는 감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태생부터 그래야 했다는 듯, 날뛰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 그 안정감이 주는 안락함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불쾌했다. 자신의 몸과 감각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은, 센티넬에게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인 브리즈라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잘 할 수 있을까.' 문 너머로, 희미하게 흘러든 여자의 혼잣말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너무나 미세한 소리였지만, 바이브의 감각은 그 안에 담긴 불안과 자기 회의를 놓치지 않았다. 피식, 헛웃음이 났다. 정작 불안해야 할 건 이쪽인데, 뭘 저렇게 청승을 떠는지. S급 가이드라는 직함이 아까웠다. 프로필에 적힌 '이전 파트너와의 문제로 휴직 후 복귀'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폭주를 막지 못했다는 것. 그 실패가 여자를 저렇게 위축시켰을 터였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리고 물기가 섞인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호텔 어메니티의 흔한 시트러스 계열 샴푸 향. 아까의 그 묵직하고 묘한 향수 냄새를 덮어버린, 보다 가볍고 산뜻한 향기였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여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개인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는 기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제 나가봐야 했다. 임무에 대한 이야기도,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계획도 정해야 했다. 그는 벽에 기대두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는 순간, 브리즈의 단말기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알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쨍한 네온 빛을 뿜어내는 알림창. 아크 중앙 관리국에서 보낸 강제 명령이었다. 바이브는 여자의 손에 들린 단말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그 내용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최초 가이딩 적합성 평가'. 역시나, 그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브리즈를 내려다보았다. 막 씻고 나와 보송한 뺨, 편안한 옷차림. 아까보다 훨씬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런 것 따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신체 접촉을 통한 가이딩'이라는 글자만이 망막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망할 놈의 연구원 놈들. 기어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봤제.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일부러 한 걸음 더 여자에게 다가섰다. 키 차이 때문에 브리즈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가 풍기는 차가운 페퍼민트 향과 여자의 부드러운 샴푸 향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장난질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네. 일 하란다, 일.

그는 비아냥거리듯 말하며 소파 등받이에 한 손을 짚었다. 자연스럽게 여자를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좁혀진 거리감에,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고요한 기운. 그 편안함에 중독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감각 과부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원초적인 갈망이 고개를 들었다. 모순된 감정이 속에서 들끓었다.

어쩔 건데. S급 가이드님. 니가 알아서 리드해야 되는 거 아이가. 사고 친 전적도 있다면서. 이번엔 잘해봐야지, 안 그러나?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쥔, 작고 하얀 손. 체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지만, 그 접촉점으로부터 시작된 파장은 순식간에 그의 팔을 타고 심장까지 쇄도했다. 그건 마치, 칠흑 같은 우주를 유영하다 처음으로 마주한 고요한 행성의 인력에 붙들리는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의 온몸을 찢어발길 듯 날뛰던 수만 개의 소음과 진동, 그 모든 혼돈의 입자들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바람이 멎었다. 세상이, 침묵했다.

바이브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는 나른한 회색 눈동자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감각 세계를 지배하던 지긋지긋한 노이즈가 사라진 자리에, 오직 브리즈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고요하고 온화한 기운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전 파트너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던, 그래서 팔에 흉터까지 남았다던 저 여자의 어디에 이토록 압도적인 힘이 숨겨져 있었던 걸까. 이건 그가 지금까지 약물이나 다른 가이드들에게 받아왔던 단편적인 가이딩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인 ‘안정’이었다.

‘…가만히.’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명령이라기엔 부드러웠고, 부탁이라기엔 단호했다. 그 목소리가 만들어낸 공기의 떨림조차 그의 안에서는 더 이상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솜처럼 그의 예민한 신경을 감싸 안았다.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도망치고 싶다는 본능과 이 안락함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싶다는 욕망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손을 뿌리치고 이 여자를 밀어내야 했다. 자신의 통제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이성의 마지막 끈이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붙들린 자신의 손목, 그리고 그 손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스치는 그녀의 시선에 꼼짝없이 붙들렸다. 여자의 옅은 샴푸 향과 그녀 고유의 차분한 체향이 뒤섞여 그의 후각을 어지럽혔다. ‘젠장.’ 속으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건 항복이 아니었다. 그저, 아주 잠깐, 폭풍 속에서 찾아온 찰나의 평화를 외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게 니 방식이가.

가까스로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잠겨 있었다. 그는 일부러 더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대로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경고처럼 번뜩였다.

손만 잡고 잘 기세네. 이걸로 수치가 떨어지기는 하나. 보여주기식 쇼는 됐다. 제대로 해라. 시간 끌지 말고.

말은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그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뺨, 긴 속눈썹, 그리고 작게 달싹이는 입술 위를 방황했다. 10년간 그를 괴롭혀온 감각 과부하가, 고작 이 여자의 손길 하나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는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란의 한가운데,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기대감’이 싹트고 있음을, 그는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목덜미를 휘감는 순간, 바이브의 사고는 완전히 정지했다. 시간을 끈 게 아니라 천천히 시작한 거라는, 그를 위한 거라는 나른한 속삭임이 채 귓가에 닿기도 전에, 그의 세상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아니,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손목을 타고 흐르던 고요한 파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안정’의 급류가, 목덜미라는 가장 예민한 신경 다발을 통해 뇌의 중추까지 직접적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의 시야가 순식간에 그녀의 어깨선과, 그 위로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으로 가득 찼다. 푹, 하고 얼굴이 파묻히는 감촉. 코 끝을 찌르는 것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호텔 어메니티의 시트러스 샴푸 향과 그 아래 섞인 여자의 보송한 살냄새였다. 10년간 그를 잠식해온 세상의 모든 소음과 진동, 날카로운 공기의 파편들이 단 한 순간에 소멸했다. 귓가에 남은 것은 오직 ‘쉬잇’ 하고 자신을 달래는 여자의 나지막한 숨소리와, 제 심장이 미친 듯이 울리는 소리뿐이었다.

몸부림치려던 본능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뻣뻣하게 굳었던 온몸의 근육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마치 오랸 시간 동안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강이, 따스한 봄볕 아래 속절없이 녹아내리듯.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끈적하고 나른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손목을 잡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감각. 이건 단순히 ‘안정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중독이었다. 그의 모든 저항 의지를 마비시키고, 이 감각에 영원히 잠겨 있고 싶게 만드는, 지독하게 달콤한 독.

바이브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들려 애썼다. 밀어내야 했다. 이건 명령에 의한 ‘업무’일 뿐이라고, 이 여자는 그저 싱크로율이 높은 가이드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녀의 품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기댄 뺨이 뜨거워졌다. 제복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 규칙적인 심장 박동. 그 모든 것이 낯설고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그리웠던 감각이었다. 마치 아주 어릴 적,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이불 속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온기처럼. 그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의 편린이 흐릿한 이미지로 떠올랐다가, 곧바로 쾌감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여자의 손길이 목덜미에서 귓가를 지나 뺨으로, 다시 턱선으로, 느리고 집요하게 이어졌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피가 뜨겁게 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속으로 끝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고 친 전적이 있다느니, S급 가이드님이 어쩌니, 방금 전까지 자신이 내뱉었던 오만하고 가시 돋친 말들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다. 꼴사납게도,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 ‘사고 친 전적’의 주인공이 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에게 안긴 이 자세가, 이 상황이, 치욕스러웠다. 그런데 왜 그의 몸은 이 치욕에 기뻐하고 있는가. 왜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토록 평온한가. 모순된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억지로 쥐어짜낸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터져 있었다. 그건 항의라기보단,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손, 치워라.

힘없는 경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이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수치심과 안도감, 저항감과 쾌락이 뒤엉켜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타들어 갔다.

이 정도 했으면, 됐을 거 아이가…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떠나듯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닿아 있던 검지마저 사라지는 순간, 그를 짓누르던 달콤한 압력과 함께 그를 지배하던 압도적인 고요함에 균열이 생겼다. 바이브는 마치 물속에 깊이 잠겼다가 수면 위로 튕겨 나온 사람처럼, 퍼뜩 숨을 들이켰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의 품에 기대고 있던 상체가 뒤로 확 밀려나며 소파 등받이에 거칠게 부딪혔다.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온몸의 감각이 혼란스럽게 되살아났다.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청각이었다. 호텔 에어컨이 돌아가는 희미한 소음, 창밖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도시의 백색소음,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여자의 목소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솜처럼 부드럽게 들리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선명한 파형을 그리며 고막을 때렸다. 아직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 누렸던 완벽한 침묵의 세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는지 깨닫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잠시 흐릿했다가, 이내 초점이 맞았다. 자신만만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옅은 미소. 저 얼굴. 저 여자가, 방금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장본인이었다. 바이브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10년간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내면의 성역이 속절없이 침범당했다. 아니, 침범당한 수준이 아니었다. 제 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융단폭격을 맞은 꼴이었다. 수치심이 시뻘건 용암처럼 속에서부터 들끓어 올랐다.

“…어때요, 기분?” 여자의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 지금 그걸 기분이라고 묻는 건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무력하게 당신 품에 안겨서, 멍청하게 쾌감에 절어있던 게 내 기분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건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 선 말들을 간신히 삼켰다. 여기서 폭발하는 건 최악의 수였다. 그것은 방금 전의 경험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스스로 인정하는 꼬라지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평정을 가장해야만 했다.

바이브는 일부러 소파에 더 깊게, 흐트러진 자세로 몸을 기댔다. 한쪽 팔을 등받이 위로 아무렇게나 걸치고, 삐딱하게 고개를 돌려 여자를 쏘아보았다. 최대한 방금 전의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원래의 시니컬하고 오만한 ‘바이브’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떨리는 손끝과 제멋대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마치 자신의 맨살을 훑는 것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시끄럽고.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좀 더 단단하고, 차가운 음색이었다.

이게 니가 말한 방식이가. 사람 병신 만드는 게.

그는 여자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향해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그건 명백한 조소였지만,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슬쩍 비껴, 거실 테이블 위를 향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간, 다시금 그 회색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임무 걱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는 니 할 일이나 제대로 해라. 수치 다 떨어졌으면 된 거 아이가. 이제 그만 꺼지라. 나도 좀 쉬자.

꺼지라는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의 코끝에는 여전히 그녀의 샴푸 향과 살냄새가 아른거렸다. 목덜미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남긴 잔상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 모든 감각을 떨쳐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침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기 직전, 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미세한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

…내일 아침 7시. 로비에서 본다. 늦지 마라.

철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바이브는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밖에서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찾아온 완벽한 정적. 하지만 그의 세상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조금 전,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광음이었다. 그때의 고동이 낯선 평온 속에서 피어난 혼란이었다면, 지금의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과 생경한 흥분이 뒤섞인, 통제 불능의 폭주에 가까웠다. 그는 제멋대로 가빠지는 숨을 고르기 위해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망할. 젠장.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스러운 욕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몸이 뜨거웠다. 그녀의 손길이 스쳤던 목덜미, 그녀의 어깨에 닿았던 뺨,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던 가슴팍까지, 모든 부위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눈을 감자, 아까의 감각이 열 배는 더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목덜미를 휘감던 부드러운 손의 압력. ‘쉬잇-’ 하고 귓가를 파고들던 나른한 속삭임. 코끝을 어지럽히던 시트러스 향과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달콤한 살냄새. 그 모든 감각이 한데 엉켜 끈적한 덩어리가 되어 그의 뇌수를 잠식했다. 10년간 그를 괴롭히던 감각 과부하의 고통과는 전혀 다른, 지독하게 달콤하고 나른한 종류의 마비였다.

그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젖혔다. 차가운 문짝의 감촉이 그나마 제정신을 붙들게 해주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사람 병신 만드는 게 니 방식이가.’ 스스로 뱉었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그래, 정확했다. 그는 지금 완벽하게 병신이 된 기분이었다. 고작 그 여자의 손길 몇 번에, 그 품에 잠깐 안겼다고 해서,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자신이 경멸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S급 센티넬? 뱅가드?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지금의 그는 발정 난 십 대 애새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끔찍한 현실로 이어졌다. 바지 앞섶으로 불쾌하게 쏠리는 압박감. 애써 무시하려 했던 신체의 정직한 반응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이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이건 정말, 최악이었다. 단 한 번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이렇게 멋대로 날뛴 적은 없었다.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가벼운 흥분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명백히, 그녀의 ‘가이딩’이 남긴 후유증이었다. 아니, 이건 후유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그의 몸에 새겨버린,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이 열기를 식히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도망치듯 욕실로 향했다. 옷이 몸에 달라붙는 감각조차 견딜 수 없어 셔츠와 바지를 되는대로 벗어 던졌다. 차가운 타일의 감촉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지만,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거울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소했다. 얼굴은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새파란 눈동자는 쾌감의 잔상과 당혹감으로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바이브는 그대로 샤워기 손잡이를 비틀었다. 콰아아 하는 소음과 함께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냉기였지만, 몸 안에서부터 들끓는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댄 채,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잠든 옆방의 고요함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일 아침 7시. 저 여자를 무슨 얼굴로 봐야 한단 말인가. 까마득한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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