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프로필 서류에서 봤던, 잉크로 박제된 활자가 아니었다. 살과 온도를 가진 목소리. 그의 감각을 어지럽히던 모든 소음과 진동을 잠재우고, 유일하게 고요한 파동으로 전해져 오는 음성이었다. 낯설고, 또 이상하게 편안한 울림. 그 이질적인 감각에 바이브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좁혀졌다.
인사를 건네며 여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주변으로 부스스한 잔머리 몇 가닥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저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자연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바이브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공기의 입자들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어떻게 감싸고, 어떤 방향으로 흩날리는지, 그 미세한 궤적 하나하나가 망막에 필름처럼 새겨졌다.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혹은 그저 수많은 자극 중 하나로 스쳐 지나갔을 무의미한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바이브는 대답 대신, 그저 상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프로필 사진보다 실물이 더… 작고 말랐다. 저런 가느다란 몸 어디에서 바람의 힘을 다스리는 기운이 나온단 말인가. 자신과 같은 속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여자가 풍기는 기운은 잔잔했다. 마치 폭풍의 눈처럼, 자신의 주변만은 모든 소란을 집어삼킨 듯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자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저 순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그럴 것 같았다.
'싱크로율 85%.' 서류에 적힌 숫자가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껏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맞춰보지 못한 수치. 기관에서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시큰둥했다. 파트너 따위,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아니, 혼자여야만 했다. 자신의 예민한 감각은 타인과의 공존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브리즈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거슬리기는커녕, 오히려 날뛰는 감각을 억지로 눌러주는 듯한 이 기묘한 안정감. 이건 대체 뭐지. 약이라도 빨고 왔나.
그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 한쪽으로 짝다리를 짚으며 자세를 바꿨다. 조금 더 가까워진 거리. 훅 끼쳐오는 낯선 향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무겁고, 어딘가 나무 냄새 같기도 한… 향수인가. 이따위 위험한 현장에 나오면서 향수까지 뿌리고 다니는 건가. 제정신이 아닌 건가, 아니면 어지간히 여유가 넘치는 건가. 어느 쪽이든, 바이브의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향이 여자가 몰고 온 고요한 공기와 섞여들자 제법 괜찮은 조합처럼 느껴졌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로, 이상한 여자다.
한참 동안 말없이 여자를 훑어보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느릿하게 열렸다. 툭, 던지는 듯한 짧은 한 마디. 거기에는 어떤 환영의 인사도, 의례적인 자기소개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알아.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브리즈의 어깨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부산항의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개의 크레인이 뱉어내는 소음,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의 기계음, 밤바다의 파도 소리. 여전히 모든 것이 소란스러웠지만, 신기하게도 아까처럼 신경이 곤두서지는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이 작은 가이드가, 마치 거대한 방음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바이브는 턱을 까딱해 저편에 보이는 호텔 건물을 가리켰다. 일단은 저기로 가야 했다. 임무에 대한 브리핑도, 앞으로의 계획도. 전부 다 귀찮았지만, 어쨌든 일은 일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상하고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여자의 옆에 더 있다가는, 10년 동안 단단하게 쌓아 올린 자신만의 벽에 금이라도 갈 것 같았다.
일단 가자. 할 얘기 많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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