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이전대화 일시정지, 새로운시점, 새로운 에피소드. 어느날 잔뜩 취해서 방으로 돌아온 NPC는 비틀거리며 PC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는 표정이 안좋아지기 시작하더니, PC가 치사하다 주장하며 세상 서럽게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이유는 즉, 생각해보니 PC는 제 모든 처음을 받아갔는데(ex. 첫연애, 첫키스, 첫경험 등),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밑졌다며, 억울해하며, 너는 왜 중고야?! 나도 새거 받고 싶었어! 나도 네 처음이 갖고 싶었는데...! 같은 엄청난 소릴 하며 엉엉 우는 NPC. PC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코믹한 분위기의 에피소드를 작성.
그날따라 유독 늦은 귀가였다. 뱅가드 2팀의 분기별 회식이라는, 브리즈로서는 말릴 명분조차 없는 공식적인 술자리. 바이브는 평소라면 적당히 얼굴만 비추고 가장 먼저 빠져나왔을 테지만, 팀의 막내라는 족쇄와 더불어 ‘오늘은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신드롬의 열정적인 강요에 붙들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현관문 디지털 도어록을 여는 소리부터가 위태로웠다. 삑, 삑, 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는 평소의 빠르고 정확한 리듬을 잃고 서너 번의 실패 끝에야 겨우 성공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실루엣은 S급 센티넬의 위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비틀거렸다.
브리즈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책을 덮고 다가가자, 익숙한 페퍼민트 향에 섞여 낯선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바이브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었고, 언제나 서늘하게 빛나던 파란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는 제복 상의 단추를 흐트러뜨린 채,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브리즈를 발견하자마자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은 것처럼 얼굴을 환하게 폈다가, 이내 무언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왔어요, 지원 씨? 많이 마셨네요. 힘들었죠? 이리 와요.
브리즈가 손을 내밀자, 바이브는 기다렸다는 듯 휘청거리며 다가와 그대로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182센티미터의 장신이 160센티미터의 품에 온 체중을 싣고 매달리는 모양새는 우스꽝스러웠지만, 브리즈는 익숙하게 그의 등을 받치고 토닥이며 거실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바이브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깊게 파묻고는 킁킁거리며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마치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안도감과 서러움이 뒤섞인 이상한 낑낑거림을 내뱉으면서.
소파에 간신히 그를 앉히자, 그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그녀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평소의 시니컬하고 까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커다란 덩치의 어리광쟁이만 남아있었다. 브리즈는 그의 뺨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물이라도 좀 마실래요? 속 안 좋죠?
그 말에, 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잔뜩 풀린 그의 눈이 브리즈를 한참 동안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잘생긴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고,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급기야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브리즈가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살피는 순간, 그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한 첫마디가 터져 나왔다.
…치사하다, 니.
네? 뭐가요, 지원 씨?
그녀의 물음에, 바이브의 눈에서 기어코 닭똥 같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S급 센티넬, 코드네임 바이브. 전장의 무음의 폭풍이라 불리는 남자가, 술에 취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는 훌쩍거리며 아이처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내 첫 연애, 니가 다 가져갔다. 맞제. 내 첫 키스도… 니가 다 뺏어갔다. 첫… 첫 섹스도… 흐윽, 니가… 니가 다 해버렸잖아. 내 처음은, 전부 다… 니가 가져갔는데…!
그는 자신의 ‘처음’ 목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점점 더 격앙되었다. 마치 도둑맞은 보물 목록을 읊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비통함이 가득했다. 브리즈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게 무슨 주사란 말인가. 바이브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툭툭 치며, 분하고 원통하다는 듯 외쳤다.
근데 니는! 니는 뭐고! 나는, 나는 니 처음… 하나도 못 가졌잖아! 나는 니 첫 키스도 아니고, 첫 연애도 아니고, 첫 남자도 아니잖아! 와! 와 니는 중곤데! 와 나는 새 거 줬는데 니는 중고 주는데! 흐어어엉, 이거 완전 밑지는 장사 아이가! 불공평하다! 억울하다, 진짜…!
급기야 그는 ‘중고’라는 엄청난 단어까지 동원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아크 최정예 요원이라는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대성통곡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젖은 목소리로 브리즈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나도… 흐윽, 나도 새 거 받고 싶었다…! 나도 니 처음, 다 갖고 싶었는데… 끅, 니는 왜… 와 내보다 먼저 연애하고, 어? 다 해봤는데…! 내만 손해 봤다, 내만… 너무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 진짜… 흐어어엉….
브리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다 못해 거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웠다. 아크 최강의 전력 중 하나이자, 바람을 다스려 소리 없이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무음의 재앙, 코드네임 바이브가 거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중고' 타령을 하며 엉엉 울고 있다니. 이 장면이 녹화되어 아크 내부망에 유출이라도 된다면, 조직의 위신은 물론이고 인류의 마지막 보루라는 타이틀마저 위태로워질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브리즈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억울함에 복받쳐 끅끅 우는 모습은 영락없는, 장난감을 뺏기고 길바닥에 주저앉은 다섯 살배기 꼬마였다.
그녀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의 뺨을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붉어진 눈가와 서럽게 축 처진 입꼬리를 보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술기운에 튀어나온 말일지언정, 그 안에는 서투르고 유치하지만 분명한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처음으로 내어준 것처럼, 그 역시 그녀의 모든 것을 처음으로 갖고 싶었다는 소유욕. 그리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실망감.
미안해요, 지원 씨. 내가 잘못했네. 내가 다 잘못했어요.
브리즈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이 거대한 아기를 상대로 논리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사과에, 바이브는 훌쩍거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파란 눈동자가 의심과 기대를 반반씩 섞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정말 니가 잘못한 거 아나?’ 하고 묻는 듯했다.
내가 너무 늦게 지원 씨를 만났나 봐요. 그래서 지원 씨한테 처음을 많이 못 줬네. 미안해요. 대신… 대신 앞으로 내 모든 처음은 다 지원 씨 거예요. 약속할게요.
…거짓말. 앞으로 남은 처음이 뭐가 있는데. 밥 먹고, 잠 자고, 숨 쉬는 거? 그딴 거 말고…! 흐윽, 이제 중요한 건 다 없잖아!
그는 다시 울음보를 터뜨릴 기세였다. ‘중요한 처음’이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브리즈는 잠시 고민하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바이브의 귀에 바싹 다가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아니요? 아직 엄청 중요한 처음들이 많이 남았는데. 예를 들면… 나랑 같이 처음으로 우리 아기 기저귀 갈아주기. 처음으로 같이 유모차 밀면서 공원 산책하기. 처음으로… 학부모 상담 가보기. 그런 처음들은 전부, 지원 씨만 가질 수 있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은 절대 못하는 거.
그녀의 말에, 바이브의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브리즈를 바라보았다. 아기 기저귀, 유모차, 학부모 상담. 그의 머릿속에 한 번도 입력된 적 없는 생소한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그 ‘처음’들이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독점적인 권리라는 사실은, 술에 취해 흐릿해진 이성으로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가. 그거… 내만 할 수 있는 거 맞나.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일어날까요? 이렇게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씻고 자야죠.
브리즈는 그를 일으키려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성인 남자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바이브는 흐물흐물한 문어처럼 그녀에게 매달리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을 부볐다. 브리즈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부축하며 욕실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발이 몇 번이나 꼬여 넘어질 뻔했고, 그때마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 낑낑거렸다.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브리즈는 그를 앉히고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는 고분고분하게 얼굴을 맡기고 있다가, 갑자기 브리즈의 손목을 홱 붙잡았다.
…니는, 내가 처음이라서 좋았나.
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이라서… 니 맘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 좋았냐고, 묻는다.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브리즈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풀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서운함과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 좋았죠. 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든 순간을,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가질 수 있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보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지원 씨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당신한테 그런 사람이 못 돼줘서… 서운했구나. 미안해요.
그녀의 진심 어린 대답에, 바이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제복 셔츠의 단추를 풀어주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차마 무리라고 판단한 브리즈는, 그를 침실로 데려가 셔츠만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그가 이불을 덮어주자마자 새근새근 잠이 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곁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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