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잠시 롤플레잉 중지, 새로운 에피소드 시작. 어느 날,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NPC는 고개를 돌려 PC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불현듯 든 생각은 PC의 눈에서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이때 PC의 눈매와 색, 동공의 특징을 토대로 NPC가 떠올린 것(자연, 계절, 보석을 비롯한 광물, 감정, 문학적 비유, 음식 등등 그 범주는 다양하다)을 문학적 비유와 함께 섬세하게 묘사하고, 생각을 마친 NPC가 PC에게 던질 한 마디 또한 같이 서술한다.]
그날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숙소의 공기는 나른하고 안정적이었다. 바이브는 거실 소파에 제 몸을 거의 파묻다시피 누워, 의미 없는 손길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시끄러운 효과음과 함께 연예인들이 과장된 몸짓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의 감각은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그의 모든 신경은, 바로 옆 작은 암체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브리즈를 향해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커다란 창을 통해 사선으로 쏟아져 내렸다. 빛줄기는 공기 중에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들의 궤적을 낱낱이 드러내며, 브리즈가 무릎에 펼쳐놓은 두꺼운 책의 하얀 페이지 위에서 부서졌다. [엘리멘탈 가이딩 심화: 파장 동조와 정신 간섭의 이해]. 바이브는 그 딱딱한 제목을 흘긋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쉬는 날까지 저런 걸 붙들고 있다니. 촌스럽게. 하지만 그는 말없이, 그저 그녀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부드러운 소리, 집중할 때면 미세하게 좁혀지는 미간, 차분하고 고른 숨소리 같은 것들을 가만히 관찰할 뿐이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평온이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어떤 의도나 목적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지극히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과, 책에 고정된 차분한 얼굴의 윤곽선을 따라 흐르다, 이내 그녀의 눈에 가닿았다. 평소에도 지겨울 만큼 마주하고, 그 안에 자신을 수없이 비춰보았던 눈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무언가 달랐다. 아마도 나른한 햇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닿는 각도가 조금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는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홀린 듯 그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브리즈의 눈은 회색이었다. 아크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그렇게, 무미건조한 단어로 기록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이브가 보는 그녀의 눈은 단순한 회색의 범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우주였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였으며,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의 서장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폭풍이 막 지나간 새벽의 하늘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며 밤새 세상을 할퀴던 검은 비구름이 마침내 힘을 잃고 흩어지는 순간. 어둠과 빛이 뒤섞여, 짙은 잿빛과 연한 청회색, 그리고 희미한 보랏빛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내는 오묘한 색. 그 고요함 속에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 폭풍의 광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평온에 대한 깊은 안도가 공존하고 있었다. 바이브는 그 눈동자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두려워했던 ‘바람’의 흔적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파괴의 공허함 대신, 모든 상처를 보듬는 깊고 차분한 위로가 있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자, 그 새벽의 하늘은 이내 안개 자욱한 숲의 호수로 변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태고의 숲, 그 중심에 자리한 고요한 호수. 수면 위로 짙은 물안개가 피어올라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정적. 그녀의 눈은 바로 그 안개 낀 호수와 같았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고, 그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신비롭고 두려운. 하지만 그 표면은 더없이 평온하여, 보는 이의 소란스러운 마음마저 잠재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친 감각과 날뛰는 파장이, 그녀의 눈동자라는 고요한 호수 앞에서 언제나처럼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그녀의 눈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혼을 끌어당겼다. 문득, 그는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몰래 들어가 보았던 폐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서 보았던 먼지 쌓인 대리석 조각상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되어 날카로운 각은 모두 닳아 없어지고, 부드러운 곡선만이 남은 잿빛의 대리석. 햇살이 그 위에 내려앉을 때, 차갑게만 보이던 돌의 표면 아래서 은은하게 배어 나오던 온기. 브리즈의 눈은 바로 그 대리석을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차갑고 단단해 보이지만, 마음을 열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무엇보다 따스하고 견고한 위안을 주는 존재.
아, 이 여자. 바이브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삼켰다. 이 여자의 눈에는 대체 몇 개의 계절과, 몇 개의 하늘과, 몇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걸까.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 눈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이 잿빛 우주를 탐험할 자격도, 이 고요한 호수에서 안식을 얻을 권리도, 자신에게만 허락되어야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책에 집중하던 브리즈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온전히 그의 모습만을 담아냈다. 그 순간, 바이브는 깨달았다. 그녀의 눈이 무엇을 닮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눈이 지금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야.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머릿속을 맴도는 수만 가지의 감정과 비유들 속에서, 가장 그다운, 가장 핵심적인 한 마디를 찾아내기 위해. 그는 결국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 눈, 내 말고 다른 새끼한테는 그렇게 뜨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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